국제 국제일반

[Culture&Life]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대표

"소통이 현대공연 트렌드… 관객도 같이 무대 올라야죠"



대학생때 엑스트라로 연극 계기
물리학도서 배우·연출가로 돌아서 연극에 일상생활 정서 담기 노력
'교육연극 이론' 실제 접목 앞장

예술제·합창단·연극교실·문화마당 등 다양한 시민참여형 행사 늘려 호평
10월 50개팀 생활오케스트라도 준비



어쩌면 '한국의 아인슈타인'이 될 뻔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아인슈타인 전기를 읽은 까까머리 중학생은 '나도 이런 물리학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수재였던 모양이다. 과외 한 번 받아본 적 없었지만 서울대 물리학과에 합격했다. 대학생활은 더 치열했다. 학과수업을 따라가는 데만 일주일에 2~3일을 새야 했다. 좋아서 하는 공부인데도 피로가 몰려올 무렵이었다. 친구가 "연극반 엑스트라 한 명이 모자라는데 좀 와주면 안될까"라고 부탁했다. 연습실에 따라가 봤더니 같은 장면을 수없이 반복해 연습하는 단원들의 모습이 '공부보다 더 열심'이었다. 그래서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물리학도에서 연극배우, 연극 연출가를 거쳐 세종문화회관 사장에까지 이른 박인배(사진) 사장이다. 열정으로 가득한 현장의 숨소리, 기대에 찬 관객의 눈빛은 지금도 그를 달아오르게 만든다.

"단 한 번, 막 뒤에서 엑스트라만 하고 관두려고 했는데 그렇게 빠져나오는 게 제 맘대로 되지는 않더라고요. 슬슬 연기에 맛이 들렸어요. 관객과의 교감도 즐겼고요. 대학에서 그렇게 배우를 하다 연출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온 후 연극반 선배들의 극단이 있는 혜화동 로터리(대학로) 연우무대를 찾아간 게 본격적으로 연출을 배우기 시작한 계기가 됐어요. 돌이켜보면 배우도, 연출도 우연히 시작했네요."

박 사장이 재학하던 당시 서울대는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 전 대학로 시절이었고 문화예술과는 더 밀접하게 호흡하고 있었다. 지금은 차도로 덮인 그곳의 절반은 개천이었고 주변에 늘어선 술집에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 정동영 전 장관 등이 함께 드나들었고 황지우 시인, 김석희 소설가 등과 자주 어울렸다. 물리학도에서 연극인으로의 전향은 '창의성'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어쩌면 뜻밖의 일이 아닐는지 모른다.

"물리학이나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창의적이지 않으면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어요. 아인슈타인도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 정도의 실력파 연주자이고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먼도 수준급 드럼 연주자였어요.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사람 중에는 예술을 병행하는 사람이 많은 편입니다. 저 역시 연극과 과학의 '병행'이 가능할 줄 알았고요."

과학과 연극의 두 다리를 가졌던 박 사장은 연극 쪽에 좀 더 깊이 발을 담그게 됐다. 지난 1980년대 초반 노동현장과 농촌현장에서 연극반 지도를 하며 얻은 깨달음이 큰 영향을 끼쳤다.

"자기를 표현하고 자신의 생활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당시 공단 노동자들은 중등 중퇴 정도의 학력이었고 아침 5~6시에 일어나 출근해 밤 9시는 돼야 퇴근하는 생활이었는데도 그 시간을 쪼개 연극을 하고 싶어 했어요. 연출수업을 공부하며 약간의 매너리즘에 빠지려던 제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 친구들의 표현하려는 욕구는 강렬했습니다. 본능적이다 싶을 정도로 몰두했고 심지어 그 동료들은 '우리 이야기'를 전하는 배우들을 대신해 야근을 서줄 정도였죠. '대체 무엇이 저들에게 강한 욕구를 주고 움직이게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전문가로서 연극을 만든다면 이런 사람들이 좀 더 접근하기 쉬운 방법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 뒤로 그의 관심사는 어떻게 생활정서를 연극에 담아내는가에 쏠렸다. 문자를 모르는 남미의 농부들과 연극했던 아우구스트 보아르의 사례들을 연구하고 1989년에는 연극을 놀이에서 출발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한 필리핀 PETA의 교육연극 방법론을 배우고 왔다. 이 같은 '교육 연극' 이론을 실제에 접목한 것은 그가 국내 개척자로 꼽힌다.

동시에 박 사장은 탈춤과 풍물놀이·남사당놀이 같은 우리 것을 눈여겨봤다. 30대 초반에 직접 장구를 배우기 시작해 다양한 악기를 섭렵했고 지금은 단소 배우는 데 열심이다.

"1970년대 대학가에는 탈춤 부흥운동이 일었고요, 학교 안에 전통 탈춤을 실제로 배우는 동아리도 있었죠. 오윤(1946~1986·유명 판화가로 '탈춤' 연작이 대표작)도 자주 들르고는 했었어요. 탈춤은 단순한 가면극이 아니라 마을공동체 문화의 핵심이었습니다. 마을의 연례행사이며 전통문화의 모든 것이 들어 있어요. 한 번은 양주별산대놀이를 보러 갔는데 대본을 맞춰가며 공연을 보는 나와 달리 동네 사람들은 대사·가사를 모조리 알고 있더라고요. 우리가 간직하고 전승해온 공동의 축제였던 거죠."

어느덧 그의 행보는 참여와 교감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그는 '소통'이라는 현대 공연예술의 세계적 트렌드를 일찍이 간파했다.

"아무리 잘 만든 무대도 영화만큼 사실적이지는 못하죠. 그렇다면 공연예술은 영화가 할 수 없는 부분을 관객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무대를 가득 채운 뮤지컬 군무, 입체감 있는 무대장치가 대안일 수 있죠.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과의 교감을 현장에서 끌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은 우리의 마당극이 가장 적극적이지만 현대 연출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대학로 소극장에서는 관객을 무대에 끌어 올리지 않는 공연이 거의 없죠. 나도 배우이고 싶어 하는 관객의 숨은 욕망을 잠시나마 무대에 올라와서 표현할 수 있는 장면으로 만들어주는 게 필요합니다. 나도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만족감, 관객과의 즉흥적인 소통, 현장에서 나누는 배우의 눈빛과 기운. 이런 것이 있어야 한 달 치 월급의 절반을 쏟아붓는다 해도 아깝지 않지요."

박 사장은 2012년 초 3년 임기로 취임했고 그 후 세종문화회관이 주도하는 시민참여형 프로그램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시민예술제, 시민합창단, 광화문 문화마당, 시민연극교실, 예술시장 소소 등이 대표적이다.

"시민들의 문화적 경향이 많이 바뀌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2002년 월드컵이 전환점이라 볼 수 있는데 전부 거리로 나와서 축구 진행과 상관없이 즐기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화적 발산을 하려는 욕구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때부터 문화계는 참여형 예술의 확장이 트렌드가 됐습니다. 이번 10월에 시민예술제 일환으로 '생활오케스트라'를 준비하고 있는데 수도권에만 20인 이상 오케스트라를 구성한 동아리가 150~200개나 되더군요. 이번 행사에는 그중 50여개 팀이 참여하는데 그만큼 악기를 배워 무대에서 공연하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의미죠. 우리가 프로그램을 기획해 참여형 행사가 많아진 게 아니라 그 정도의 호응이 먼저 움트고 있었다는 것이고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1999년 재단법인으로 전환한 세종문화회관은 20%도 안 되던 재정자립도를 꾸준히 끌어올려 지금은 38% 수준까지 이르렀다. 유럽 공연장과 비교해 낮은 편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마냥 낙관할 수만은 없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시행하는 '공연예술실태조사'에 따르면 공연예술 관람객 수가 뮤지컬 분야만 늘어날 뿐 타 장르는 감소 추세라는 게 문제다. 창작 작품 수는 증가했으나 관람객이 줄어드니 고사 위기다.

"미래지향의 예술창조활동을 해야 합니다. '미래형 예술'이라는 게 첨단기기를 동원한 영상매체에만 의존할 일은 아닙니다. 공연은 미래의 공연형태를 생각해 연구하고 창작태도를 발전시켜야 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관객의 다양한 참여를 유도하는 것도 대안이라 할 수 있죠. 시민 중심의 세종문화회관의 경우는 문턱을 낮춰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거듭 알리고 있습니다. 같이 한 번 무대에 올라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공공 공연장 통합정보망 내년 1월 가동… 고사위기 자치구 문예회관과 상생할 것"

기자명

박인배 사장은 공공 공연장 운영을 위한 '통합정보망'을 구축해 내년 1월 시행을 목표로 잡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전당 같은 대형 공연장이 자체 발권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덩치가 작은 소규모 공연장이나 공공 목적의 비상업적 기관의 경우는 자체 발권시스템 확보는 요원하며 수수료를 주고 대행업체에 위탁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이에 박 사장은 고사 위기에 처한 자치구 문예회관과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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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구 문예회관은 이대로라면 말라죽을 지경입니다. 이들을 활성화하려면 지금보다 더 작게 규모를 줄여 지역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들 문예회관이 무너지면 결국 공연예술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우리 세종문화회관의 프로그램을 자치구 문예회관과 공유하는 방식으로 더불어 살아가려는 것이죠. 지금 구축하고 있는 '통합정보망'은 상업적 발권이 어려운 작은 기관이나 자치구 문예회관을 아우르는 것으로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네트워크를 통한 '공유경제'로 실현하려는 전략입니다."

공공 공연장 운영의 통합정보망을 갖추면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한 서울시 자치구 산하 문예회관이 고객정보를 교류하고 공동프로모션도 추진할 수 있다. 이 경우 공동기획 프로그램의 홍보 등으로도 활용할 수 있으며 시민들은 문화서비스에 대한 접근 기회가 더욱 원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He Is…

△1953년 부산

△1972년 경복고 졸업

△1986년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1988~2009년 극단 현장 예술감독

△1988~1995년 시민모금을 통한 예술극장 한마당 건립 및 공동대표 역임

△2000~2005년 국립극장 운영자문위원

△2003~2005년 한국문예진흥원 이사

△2003년 국공립공연장 운영활성화 연구 공동연구원

△2006~2009년 안성바우덕이남사당 예술감독

△2012년~ 세종문화회관 사장

◇대표 연출작

△노래극 '노동의 새벽'

△야외총체극 '자, 우리 손을 잡자'

△노래판굿 꽃다지

△백범김구 창작뮤지컬 '못다한 사랑'

△MBC 마당놀이 '토정비결'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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