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번영의 함정, 신뢰의 위기

태풍 라마순이 많은 비와 바람을 동반하며 한반도를 지나갔으나 미국으로부터 밀려오는 금융시장의 파고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리처드 그라소 뉴욕증권거래소 회장의 표현을 빌리면 미국 금융계는 '완벽한 실패의 폭풍'을 맞고 있다. 월가를 휩쓰는 폭풍의 실체는 근본적으로 신뢰의 붕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지 소로스는 최근 연이어 터지는 회계부정 스캔들을 도덕적 원칙보다는 성공만을 중시하는 미국문화의 한 단면을 반영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완벽한 실패의 폭풍'의 배경에는 세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미국 7위의 대기업인 엔론이 지난해 말 부실회계가 폭로되면서 부도사태를 일으켰고 이번에는 미국 제2의 통신회사 월드컴의 분식회계가 문제가 되면서 현재 1,000여개 상장기업들이 전기 결산실적을 정정해 발표하고 있다. 월드컴은 지난 83년 장거리 전화 통신회사로 설립돼 MFSㆍMCI 등 통신업체들을 인수합병하며 빠르게 성장한 미국의 대표적인 통신회사로서 99년 6월 62달러까지 올랐던 주식이 이제는 1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회계부정으로 현재 제록스를 포함해 내로라 하는 기업들이 미국 SEC의 조사를 받고 있으며 잘 나가던 전현직 최고경영자(CEO)들이 분식회계ㆍ내부자거래 그리고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여기에 더해 GMㆍGEㆍ엑슨 등 미국의 간판기업들도 실적 부풀리기 의혹을 받는 등 미국은 9ㆍ11 테러에 버금가는 충격에 휩싸여 있다. 둘째, 신뢰의 위기는 미국 회계법인과 컨설팅 업체들을 진원지로 하고 있다. 엔론과 월드컴의 분식회계를 맡았던 아서앤더슨은 이미 문을 닫았고 이번에는 포천지가 선정한 세계 500대기업의 절반 이상을 컨설팅한다는 매킨지가 위기를 맞고 있다. 이 회사는 과거 18년 동안이나 엔론의 컨설팅을 맡아왔다. 글로벌크로싱ㆍK마트ㆍ스위스에어 등 최근 연이어 파산하거나 파산위기를 맞고 있는 대기업들도 매킨지의 주요 고객이다. 특히 매킨지 출신의 CEO들이 엔론에 스카우트돼 매킨지와 밀월관계가 이뤄지면서 부실회계ㆍ부실경영 등의 의혹을 사고 있다. 셋째, 신뢰위기의 진원지는 부시 행정부 고위급 관리들의 과거 행적에서 발생하고 있다. 하켄에너지의 이사를 지낸 조지 부시 대통령, 딕 체니 부통령, 폴 오닐 재무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과거 CEO 경력을 가진 핵심 관료들이 내부자거래와 부실회계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있다는 것이다. 회계부정사건에 엄중하게 대처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의지에 미국 언론들이 믿음을 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에서 제시한 세가지 신뢰의 위기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최고의 교육을 받고 전문지식을 갖춘, 미국을 끌고 가는 최고의 엘리트 집단들이 결탁해 탐욕스럽게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이다. 실로 미국주식회사를 경악하게 하는 번영의 함정이 아닐 수 없다. 90년대 미국의 신(新)경제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막대한 부를 국민들에게 안겨줬다. 그러나 번영의 뒤안길에서 미국은 신뢰의 위기라는 함정에 빠져 있다. 이러한 사태를 조망하고 분석하면서 미국경제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는 비관론과 낙관론이 교차하고 있다. 비관론자들을 신뢰의 위기가 극복되지 못한다면 투자자들이 증권시장을 외면하게 되고 이는 장기적인 주가폭락과 함께 심각한 소비지출의 위축을 초래하면서 오일쇼크로 야기된 70년대의 장기불황과 90년대 일본이 겪었던 장기침체가 미국에서 재현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전망과 대조적으로 폴 새뮤얼슨 교수는 지난주 서울경제 송현칼럼을 통해 낙관적인 전망을 피력했다. 새뮤얼슨은 미국경제의 허약함을 드러낸 일련의 부정회계, 부실 컨설팅 사건에도 불구하고 미국경제의 회복세는 지속돼 2.5~3% 수준의 경제성장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하면서 미국경제가 장기침체의 늪으로 빠질 가능성을 배제했다. 그리고 미국은 계속 세계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번의 경악스런 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새뮤얼슨의 전망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근착 이코노미스트지는 미국특집에서 이렇게 일갈했다. '미국은 잘못을 범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리더십이 없다면 세계는 더 절망적이다'라고. <이선 경희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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