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26일] 이든 조약


1786년 9월26일. 영국과 프랑스가 이든(Eden)조약을 맺었다. 골자는 저율관세와 원칙적인 자유무역. 최초의 국가간 자유통상협정이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이든조약 체결 소식에 유럽 각국은 놀랐다. 영국과 프랑스가 원수처럼 지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 지역을 둘러싼 갈등으로 시작해 영국과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쟁탈전으로 번진 7년전쟁(1756~1763년)의 뒤끝이니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서로를 증오하는 양국이 통상협정을 맺은 이유는 재정난. 광대한 식민지를 확보한 영국조차 전쟁 비용 후유증으로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다. 자유무역을 강조하는 애담 스미스의 ‘국부론’도 영국 정치인들이 협정을 추진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사정은 더욱 절박했다. 해외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어 원료 조달과 생산품 판로가 막혀버린 상황에서 수출업체들은 영국 시장을 뚫지 않는 한 도산을 피할 수 없다며 비명을 질렀다. 막 태동한 프랑스 경제학의 주류인 중농주의 학파가 자유무역을 옹호했다는 점도 조약 체결론에 힘을 실어줬다. 조약의 결과는 프랑스 산업의 몰락. 관세인하로 저가의 영국 면직품이 쏟아져 들어온 반면 기대했던 포도주 등의 수출은 크지 늘지 않았다. 경제난은 가중되고 파리의 실업률이 50%를 넘어서자 쌓이고 쌓인 민중의 분노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눈앞에 둔 한국의 처지는 220년 전 프랑스를 닮았다. 당시 프랑스에서도 수출산업은 이든협정을 재촉한 반면 내수산업계는 반대에 목을 걸었다. 실권을 쥔 경제관료들이 영국보다 더 적극적으로 조약을 추진하는 가운데 정치권은 당리당략으로 일관했다는 점도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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