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리포트] 금융 구조조정 '부실정리부터'
주택은행이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 상장되기 하루 전인 지난 2일 저녁 김정태(金正泰) 주택은행장과 뉴욕 특파원들의 저녁자리에서 나온 얘기다.
김행장은 주택은행의 NYSE 상장이 예상했던 것보다 다소 늦어진 게 「은행 합병설」에 대한 뉴욕 증권거래소측의 계속된 확인작업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NYSE 상장이 끝난 후에 상장기업이 다른 기업과 합병하는 것이야 NYSE가 따질
일이 아니겠지만 상장절차를 진행중인 상황에서 한국 언론이 주택은행과 다른 은행의 합병설을 계속 거론했고 이에 따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NYSE가 이에 대한 확인을 요청하는 바람에 상장작업 진행이 계속 미뤄졌다는 것이다.
김행장은 언론에 거론된 은행의 최고경영진과 단 한번도 합병문제를 얘기해본 적이 없는데도 정부 고위관계자가 주택-한미-하나은행의 합병을 거론하고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하는 식의 일이 왜 생기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했다. NYSE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사실무근이라면 왜 법적 대응을 하지않느냐고 따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택은행은 전혀 합병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김행장은 전혀 의외의 답변을 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들의 합병문제가 어떻게 되느냐를 지켜본 후에 따져볼 일이라는 것이었다. 한빛, 조흥, 외환 등이 앞으로 합병 등을 통해 정말로 경쟁력을 갖춘 대형은행으로 탈바꿈할 것처럼 보이면 진지하게 대형은행으로의 합병을 검토할 일이지만, 공적자금 투입은행들이 모양새만 갖추는 방식의 구조조정으로 마감된다면 주택은행이 현 상태로도 경쟁력을 충분히 갖출 수 있는데 굳이 합병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선택할 필요가 있느냐는 솔직하면서도 타당성 있는 답변였다.
김행장은 또 공적자금 투입은행의 합병 등에 앞서 주택은행 등 우량은행이 먼저 합병작업을 진행시켜줬으면 하는 게 정부의 생각인 것같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얼핏 전체적인 금융구조조정을 도외시한 채 주택은행의 살 길만을 찾는 이기적인 생각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주택은행의 현 상태를 고집하는게 아니라 앞으로 수년 또는 십수년후의 한국 금융산업의 모습을 감안한 주택은행의 장래를 선택하겠다는 점을 감안할 때, 또 주택은행 등 상대적으로 우량한 은행들이 가장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게 한국 금융산업의 장래를 좌우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부분에서 정부가 자주 주장하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은행」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김행장의 생각은 분명 세계적인 은행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경쟁력있고, 세계적인 은행은 아니더라도 세계적인 기준에 비춰서도 나름대로
경쟁력있는 은행이 김행장의 목표인 것이다.
달리 말해 경쟁력있는 은행을 만들기 위해 다른 은행과의 합병이 필요한지, 아니면 독자적인 행보를 통해서인지는 향후 구조조정 상황을 감안해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 한국에 필요하고, 월가에서도 바라는 한국의 금융구조조정은 세계적인 규모, 경쟁력을 갖춘 은행의 탄생보다도 부실은행의 빠른 정리, 은행들의 독자 생존능력 확보다. 그런데 정부가 생각하는 금융 구조조정의 목표는 무엇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만든 자리였다.
/뉴욕=이세정특파원 boblee@sed.co.kr
입력시간 2000/10/0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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