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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삼성전자 직원과 미국에 본사를 둔 협력업체 직원 10여명이 반도체 관련 영업비밀 89건을 빼돌려 이 중 9건을 하이닉스에 넘긴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이들은 2005년 1월부터 무려 4년간 영업비밀을 유출해 왔으며 이 중 80나노급 이하 D램 정보 등 40건은 국가핵심기술로 지정된 주요 기술이었다. 검찰은 기술유출로 삼성전자가 입은 직접적인 피해만 해도 수천억원에 이르며 후발 주자와의 기술 격차가 줄어 발생하는 간접 피해까지 감안하면 피해액이 수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사건의 결말은 수사 초기의 떠들썩함에 비해 너무 초라했다. 올 2월 서울동부지법 선고공판에서 이들은 집행유예나 무죄를 선고 받아 모두 실형을 피했다. 영업비밀을 직접 유출했던 삼성전자 직원과 미국에 본사를 둔 협력업체 부사장, 이를 넘겨받은 하이닉스 반도체 임직원 2명이 최고 징역 1년의 유죄를 선고 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2명의 하이닉스 임직원은 각각 700만원의 벌금형에 그쳤고 나머지 관련자들은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
재판부는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은 오랜 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 축적한 중요한 자산인 것은 물론 국가적으로 중요한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어 엄정한 대처가 요구된다"면서도 "피고인들이 기술유출과 관련해 특정한 이익을 얻지 않았고 관련 업종에서 오래 성실히 근무한 점 등을 참작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요즘은 첨단기술 하나로 기업의 흥망성쇠가 좌우된다. 첨단기술과 영업기밀을 빼내려는 산업스파이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기업도 늘고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지난해 7월 영업비밀 유출 행위 등 지식재산권 침해 행위에 대한 새로운 양형기준안을 발표한 것도 이런 사회적 흐름을 반영한 결과다. 그러나 기준안이 정립됐음에도 불구하고 예전부터 지적된 문제점들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산업계 등에서'처벌이 너무 약하다', '실효성이 없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양형위가 내놓은 새 양형기준안은 영업비밀 침해행위에 대해 ▦국내 유출은 징역 8월~1년 6월 ▦국외 유출은 1년~3년으로 형량을 정해 국내에 비해 해외유출을 엄격하게 다루도록 했다. 또 피해기업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거나 국가 사회적으로 파급효과가 큰 영업비밀에 관한 사항일 경우 가중처벌할 수 있게 했다. 국가 주요 기술을 해외로 유출한 경우에는 최고 5년의 징역형을 받게 해 최고 2~3년형에 그치는 여타 지재권 침해 범죄와 차이를 뒀다.
하지만 양형위의 결정에 만족감을 드러내는 기업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다른 형사사건에 비해 집행유예 비율이 유달리 높기 때문이다. 각종 감형 사유를 적용해 빠져나갈 수 있는 여지도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실제로 영업비밀 침해 행위가 정하고 있는 감형 요소는 행위자가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초범이거나 ▦진지한 반성이 있는 경우 ▦범행 가담에 참작할 만한 요소가 있는 경우 등이다.
신혁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정책기획실장은 "영업기밀 유출 범죄의 80% 이상이 전ㆍ현직 직원이나 협력업체 직원을 통해 이뤄지다 보니 초범이거나 건실한 직장인인 것을 감안해 감형되곤 했다"며 "피해를 입은 기업의 억울함과 손실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감형을 좀 더 엄격히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고 토로했다.
김지현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2008년부터 5년간 영업비밀 침해에 관한 국내 판례를 자체적으로 분석한 결과 무죄율이 20% 안팎이고 유죄 판결을 받아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80%에 달했다"며 "이렇게 높은 집행유예율로는 실제적인 범죄예방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양형기준이 관련법에 기재된 원래 형량보다 낮게 설정된 것도 산업계의 불만을 자아내는 요소로 작용한다. 실제로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경제적 가치가 있는 영업비밀을 해외로 유출한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재산상 이득액의 2배 이상 10배 이하에 상당하는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양형위는 동일한 범죄 행위에 대해 최고 5년의 양형을 권고했다.
신 실장은 "수사는 활발히 이뤄지는데 막상 재판에서는 솜방망이 처벌이 나오다 보니 현장에서 불만이 크다"며 "신기술이나 국가핵심기술 유출 등의 산업스파이 범죄에 대해서는 최소 5년 이상의 징역을 내리자는 법안들이 국회를 통해 발의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요구의 반증"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전문가들은 지식재산권 침해 등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만큼 벌금형 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양형기준을 적용하기에 앞서 유출된 정보가 영업기밀이냐를 따질 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재판부의 태도도 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례로 쌍용자동차 디젤 하이브리드차 기술 등을 중국 상하이자동차에 유출한 혐의로 기소된 회사 연구소 임직원 7명이 1심에 이어 지난해 8월 열린 항소심에서도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이들이 제공한 기술 자료나 설명서를 경제적 가치가 있는 영업비밀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이 넘긴 자료에는 쌍용차가 2006년 독일 F사와 함께 개발한 기술과 설명서, 쌍용차 카이런의 디젤 엔진과 변속기 기술 자료 등이 포함돼 있었다.
전 직장인 모토로라에서 시장 공략 전략 등 주요 경영자료 파일 249개를 외부로 빼낸 LG전자 직원 역시 "해당 파일이 영업기밀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지난 2월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