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구구팔팔' 함께 외치자

안산 반월공단에서 가정용 의료기기를 생산하는 P사의 김모 사장은 최근 회사 운영자금이 부족해 A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나섰다가 낭패를 보고 말았다. 김 사장은 “차라리 처음부터 자금지원이 어렵다고 했으면 시작도 안 할 것을 일주일이 넘게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하니 이제서야 안 된다고 하는 게 말이나 되냐”며 울분을 토했다. 김 사장이 은행 대출을 위해 준비한 서류는 대략 20가지. 우선 법인등기부등본과 법인인감증명서ㆍ사업자등록증ㆍ공장등록증ㆍ납세완납증명원ㆍ부가세증명원 등 세무서나 구청에서 떼야 할 서류가 열 가지가 넘고 사장 개인의 이력서와 주민등록등본ㆍ인감증명서ㆍ주주명부 등도 필요하다. 구청에서 세무서로, 세무서에서 동사무소로 뛰어다니면서 서류를 준비하다 보니 일주일이 꼬박 걸렸다. 게다가 대출을 받기 위해 작성해야 하는 신용조사의뢰서는 사장의 개인이력은 물론 사업계획, 재무제표, 향후 3년간 예상실적 및 주력 아이템에 대한 설명과 함께 시장 현황까지 요구하는 20쪽 분량의 방대한 자료로, 경리직원과 며칠 밤낮을 매달린 끝에 작성할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주변에서는 세무사에게 의뢰하라고 조언했지만 비용이 30만원도 넘게 든다”면서 “한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입장이라 차라리 내가 고생하고 말지 하고 덤볐다가 낭패만 봤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A은행이 대출을 거절한 이유는 회사 실적이 좋지 않다는 것. 김 사장은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이 늘었다고 하지만 열악한 중소기업 현장에서 느끼는 자금 체감도는 턱없이 낮다”면서 “자금뿐만 아니라 인력ㆍ환율ㆍ마케팅 등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는 요즘, 마음 같아서는 사업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한편 요즘 중소기업청ㆍ중소기업진흥공단ㆍ중소기업특별위원회 등 중소기업 관련 지원기관의 수장들 사이에서는 건배 제의를 ‘구구팔팔(9988)’이라고 하는 게 유행이 됐다. 전체 사업체 수 가운데 중소기업 비중이 99.8%(2004년 기준), 전체 종업원 수 가운데 중소기업의 고용 비중이 86.5%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만큼 우리 경제에서 중소기업의 중요성과 비중이 높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김 사장처럼 사업을 포기하고 싶다는 사장이 많은 것을 보면 그 중요성만큼 중소기업을 제대로 지원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중소기업 사장들도 ‘구구팔팔’이라고 외치며 함께 잔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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