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벤처사회로 가는 길/양평 편집위원(데스크 칼럼)

「벤처만이 살길이다」­.오늘날 우리 경제계의 구호다. 5공시절의 「정의사회구현」같이 입간판을 세워놓은 것은 아니고 실은 그런 구호가 채택된 적도 없다. 그러나 우리 경제계에서 어지럽게 흩날리는 말의 입자들을 쓸어모아 보면 신체검사장의 색맹검사표같이 그런 외침이 윤곽을 드러낸다. 지난 13일 정부가 입법예고한 「벤처기업육성 특별법 시행령」에서도 그런 울림이 들린다.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자금의 경우 흰돈과 검은돈을 묻지 않는다거나 그동안 규제가 심했던 외국인의 투자나 출자도 벤처기업에는 전면 허용한다는 등. 한마디로 「벤처」라는 외래어는 이제 국어사전에 자리를 잡게 됐고 그 쓰임새도 커서 신세대는 이 말을 통해 「모험」이라는 한문뜻을 배울 것같다. 외래어들이 곧잘 원산지와 뜻이 달라지는 수가 많으니 우리는 다시 이 말의 뜻과 우리의 풍토를 살펴봐야 할 일이다. 벤처기업은 코카콜라합작회사를 들여오듯 수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길러내야 한다. 그것은 기업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다. 항렬상 벤처는 자본주의시대에 끼여있지만 그것은 족보를 만들기 나름이다. 적어도 벤처기업이 자라나는데는 종래의 자본주의와 전혀 다른 사회와 문화풍토를 필요로 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벤처기업의 탈종교색이다. 자본주의는 중세의 신학을 무력화시키고 태어났지만 거기엔 신이 있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이 그렇듯 자본주의는 찬송가를 들으며 자랐다. 그러나 신이 죽었다는 20세기도 끝날 무렵에 태어난 벤처기업인에게 신은 없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신화 속의 기술신 헤파이스토스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닮으려 애쓸 뿐이다. 따라서 종교공화국으로 통하는 우리나라에서 벤처기업이 교회를 밀어낼지 교회가 문을 닫는 자리에 벤처기업이 들어설지 궁금하다. 벤처기업인들은 신만이 아니라 곧잘 나라도 친구도 모른 척한다. 어제까지 출근하던 사원이 오늘은 그 회사의 옆자리에 경쟁업체를 세우는 것은 물론 옛날의 동료를 빼내가려 애쓴다. 그리고 그것을 비난하면 「구닥다리」로 몰린다. 한마디로 벤처사회는 중세적인 공동체사회는 물론 국가주의적 윤리마저 졸업한 개인주의사회의 산물이다. 아직 원시공동체의 의리를 벗어나지 못한 우리 사회로서는 갈길이 바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국내의 젊은 벤처기업인들이 실리콘밸리에 진출하기 위해 미국시민권을 얻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벤처기업육성을 부르짖기에 앞서 「민족」이라면 피가 뜨거워지는 체질부터 식힐 각오가 필요하다. 그 밖의 모든 산업사회의 윤리도 수난을 당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의 영국자본주의가 도덕성으로 소문난 빅토리아여왕때 꽃피었다면 오늘날 실리콘밸리는 온갖 스캔들로 얼룩지다가 끝내는 성추행사건으로 기소된 클린턴이 이끌어가고 있다. 불과 한세대 전 록펠러부통령이 이혼한 전력 때문에 대통령출마를 포기한 것과도 다른 풍속도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않는 한 거리낄 것 없다는 개인주의가 세포에까지 스며든 오늘날 선진사회의 동성연애자들은 빅토리아시대문학의 주인공인 「테스」의 고뇌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러고 보면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의 금혼을 폐기한 것은 그 취지와 상관없이 아직도 까마득한 벤처사회를 한걸음 앞당긴 조치다. 우리에게 더 놀라운 사실은 벤처사회가 학력이라는 수직구조도 무너뜨린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인재는 대학을 졸업한뒤 대기업을 거쳐 벤처기업을 세우고 우수한 인재는 졸업하자 바로 기업을 차리고 천재는 대학을 중퇴하고 벤처기업을 차린다는 이야기는 이제 싱거운 상식이다. 그 시각에서 우리나라를 보면 과외열풍이 식어야 벤처문화가 터를 잡을지, 벤처기업이 들어서면 입시학원이 밀려날지 헷갈린다. 한마디로 혼란스러워 보이는 것이 벤처사회지만 거기엔 부러운 기준이 있다. 그것은 고도의 과학기술에 걸맞는 확실하고 투명한 질서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리콘밸리에서 매일 수없이 파산하는 벤처기업인들의 표정이 말해준다. 그들은 카우보이로 치면 총싸움이라는 「모험」에서 패한 셈이나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사격술을 원망할 뿐 총을 의심하지 않기에 다시 실험실에서 부족한 「사격솜씨」를 익힌다. 만일 총이 나가기도 하고 안 나가기도 한다면, 다시 말해 되는 일 없고 안되는 일 없는 사회에서 실패한다면 그들은 실험실보다는 교회를 찾아 『환란 속에 축복이 있나니…』하는 설교를 들으며 상해버린 몸과 마음이나마 추스르려 들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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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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