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약세] 국내경제에 '일본發 먹구름' 우려
일본을 뒤덮은 경기 후퇴의 먹구름이 국내 경제에도 어두운 먹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미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가 지난해 연초대비 14% 가량이나 급락, 우리나라 수출에 암초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같은 엔화 약세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본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반영하는 추세로 굳어지고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자칫 국내 경기가 일본의 경제 불안에 휩쓸려 내려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엔화 왜 떨어지나
달러화에 대한 엔화가치 곡선은 일본 경기회복에 대한 시장의 기대와 움직임을 같이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난해 1ㆍ4분기까지만 해도 달러당 102엔대의 강세를 유지하던 엔화가치가 하반기들어 미끄러진 것은 일본 경제를 바라보는 해외 투자가들의 시각이 기대에서 우려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경제가 10년 불황을 딛고 회복 궤도로 진입할 것이라던 지난해 초반의 전망은 7월 소고백화점을 비롯한 굵직한 업체들의 파산을 계기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대규모 도산에 따른 금융시장 경색 및 실물경제의 악화 우려가 고개를 드는 한편, 허울뿐인 구조조정으로 일본 경제의 체질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쏟아지면서 일본의 경기 회복이 사실상 물건너갔다는 전망이 확산된데 따른 것이다.
여기에 자민당 분열 조짐 등 국내 정치까지 혼미에 빠져들자 증시 침체와 함께 엔화 하락에 가속도가 붙은 것.
경제 지표도 일본 경기가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해외 투자가들의 시각을 뒷받침했다. 지난해 12월에 발표된 국내총생산(GDP)성장률은 2000년 3ㆍ4분기중 0.2%의 답보상태에 그쳤으며, 그나마 오는 2월 수정발표에서 마이너스로 떨어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당국도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 재무성(구 대장성)은 당분간 엔화 하락을 방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미국도 '강한 달러'를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고수, 엔저 추세를 사실상 용인한 상태여서 엔화는 제동없는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외환시장 어떻게 전개될까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엔화 약세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인식하던 외환 전문가들조차 지금은 엔저 현상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일부에서는 엔화가 올해 안에 달러당 130엔까지 육박할 것이란 전망이 제기될 정도다. 노무라(野村)증권은 엔ㆍ달러 환율이 오는 3월 108~118엔에서 움직이다가 연말에는 128엔까지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영국계 HSBC은행도 연말 엔화 가치가 높게는 달러당 105엔에서 낮게는 120엔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올해 외환시장의 동향을 점치는데 상당히 조심스런 입장이다. 지금의 추세가 계속된다고 단정짓기엔 국제 경제계에 도사린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 경제가 연착륙에 실패해 침체에 빠질 경우 달러화 폭락은 엔화 가치를 상대적으로 올려놓을 수 있다.
게다가 아직은 일본 경기가 침체기로 되돌아갔다고 확신하기도 시기상조다. 도쿄 증시를 빠져나간 해외 자금이 일본 자산 매입을 위해 되돌아올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또 일부 전문가들은 또 막대한 경상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이 엔화 폭락을 무한정 용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외환시장에서 엔화가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선 '재료'가 필요하다는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소시에떼 제너럴은행 도쿄지점의 외환담당 관계자는 "외환시장의 흐름이 바뀌기 위해선 도쿄증시 안정 등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며 "118엔대 정도에서 엔저 추세가 끝나리라고 보는 시장 관계자는 거의 없다"고 전했다.
한편 얼마 전까지 폭등세를 보인 유로화는 올해 강세를 유지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영국 시사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골드만삭스는 현재 유로당 0.94달러대의 유로화 가치가 연말에는 1.22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엔저 파장 어디까지 미칠까
엔화 폭락에 가장 긴장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다. 엔화가치 절하는 수출 시장에서 일본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높임으로써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에 막대한 차질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엔저에 대해 수수방관하고 있는 미국에도 어느정도의 타격은 예상된다. 엔저로 인해 질좋은 일본 제품이 싼 값에 흘러들어갈 경우 미국의 대일 수입과 무역적자폭이 크게 늘어나 경제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국제 통화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엔화가 장기적인 폭락세를 이어갈 경우 이미 강세를 유지하고 있는 달러화와 함께 유럽 12개국 단일통화인 유로화의 입김이 국제 시장에서 대폭 강화되면서, 엔화가 지난해 유로화와 마찬가지로 국제 통화시장의 3극체제에서 일시 밀려날 수도 있다.
2~3년 사이에 유로화와 엔화가 크게 요동을 치는 현상은 장기적으로 달러화의 입지만 굳혀놓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신경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