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공멸과 상생 사이

김홍길 기자<산업부>

요즘 국내 화섬원료시장을 취재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시장논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당혹감을 느낄 때가 적지않다. 통상 경쟁논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시장이라면 수요자와 공급자 중 ‘갑’의 입장에 있는 것은 수요자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국내 화섬원료시장에서는 이 같은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유화업계는 테레프탈산(TPA) 등 화섬원료를 화섬업계에 공급하는 ‘을’의 위치인 데 반해 화섬업계는 화섬원료를 사들여 섬유 원단을 만드는 ‘갑’의 지위를 누리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의 화섬업체 난립 등으로 화섬원료 수요가 급증하자 이제는 ‘갑’과 ‘을’이 역전돼버렸다. 화섬업계로서는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원료는 구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화섬업계가 원하는 대로 화섬원료 가격을 올려줘야 하는 입장이다. 실제 화섬원료는 지난해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이를 가져다 쓰는 화섬업계는 채산성 악화로 공장 가동을 중단하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을 받고있다. 때문에 화섬업계에는 불만이 팽배하다. 지난달에는 삼남석유화학이 일부 화섬업계에 원재료 수출 단가와 국내 공급가를 연동하겠다며 사실상의 원료가 인상을 추진하고 나서 화섬업계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화섬업계의 한 관계자는 “과거 유화업계가 어려울 때 화섬업계가 그나마 원료를 사줘서 지금과 같은 호황을 누리는 것 아니냐”며 “과거 어려울 때를 잊어버리고 한철 장사하듯이 원료 가격을 맘대로 올려서 받으면 결국 모두 망하자는 것”이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심지어 일부 화섬업체는 원료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감산도 불사하겠다는 강경 입장을 드러내고 있을 정도다. 이는 “유화업계가 횡포를 일삼으니 화섬업계는 감산으로 수요를 줄여 원료 가격 폭락을 유도하겠다”는 물귀신 작전인 셈이다. 이에 대해 유화업계는 “화섬업계가 스스로 경쟁력을 잃어버려 손실을 입고서도 유화업계를 대상으로 원료 가격 인하로 이를 보존하도록 해달라는 것은 전형적인 ‘떼쓰기’ 수법”이라며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과거 외환위기 당시 은행들은 서로 먼저 살겠다고 기업들의 채무를 한꺼번에 거둬들이는 바람에 숱한 기업들을 흑자도산으로 몰고 간 아픈 경험이 있다. 국내 화섬업계가 근시안적으로 출혈 경쟁에 매몰된 채 차세대 수익사업을 육성하지 못한 잘못은 크다. 그러나 화섬업계가 망하면 유화업계도 전혀 이로울 게 없다. 유화업계는 이제 ‘파이’를 먼저 키워 모두가 이기는 ‘상생의 지혜’를 한번쯤 발휘할 시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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