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택 서민이라면 누구나 집 없는 설움을 겪는다. 기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건축연한이 30년 가까이 돼 천정에서 페인트가 벗겨져 떨어질 정도로 노후됐다. 집주인에게 수리를 요청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시세가 8억원이 넘는 재건축 아파트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도 전세 살고 있는 처지에서 세입자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아래층 주민과의 층간 소음 문제 때문에 올 초 서둘러 이사 나올 때 아들녀석이 깬 창문 값 5만원을 요구했다. 해도 너무 한다 싶었지만 군말 없이 지불했다.
엊그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내놓은 주택 관련 공약을 살펴보며 이전 집주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박 후보는 전세대출금을 마련하지 못해 살 집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렌트푸어들을 위해 '목돈 안 드는 전세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자신의 주택을 담보로 직접 빌리고 세입자는 이자를 부담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실소가 절로 나왔다. 역전세난이 심각해 전세금을 깎아줘야 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철저히 공급자 우위의 현 전세시장에서 어떤 집주인이 대출까지 받아가면서 세입자를 들이려고 할까 싶어서다.
집주인은 강도를 만나 죽게 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성심껏 돌봐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렌트푸어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어 대출 부담을 대신 질만큼 착한 사람들이 아니다. 깨진 유리창 값까지도 악착같이 챙기던 집주인이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 제도를 도입하면 전셋값이 더 치솟을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 박 후보 측은 "시장원리에 의해 장기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시장원리를 안다는 사람들이 이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공약을 내놓는가. 누구 말마따나 '참 순진한 대통령 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