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동포들이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굉장해요. 일례로 한국이 처음 참가했던 올림픽이 1948년 런던올림픽이었는데 원래 우리 정부는 전쟁 직후에 무슨 스포츠냐며 안 가려고 했었답니다. 그런데 일본동포들이 '말이 안 된다. 도와줄 테니 무조건 가라'며 유니폼도 맞춰주고 경비도 대주고 하면서 보낸 거예요. 스포츠의 역사만 봐도 그런데 정치·경제 분야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하지만 우리 학교나 사회는 그런 역사에 대해 알려주지 않아요. 그런 현실이 언제나 안타까울 따름이죠."
지난 19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으로 관객을 찾은 김명준(43·사진) 감독은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내내 '안타깝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영화는 한국 야구의 태동기인 1956년부터 매년 여름이면 대한해협을 건너 한국으로 와 선진 야구 기술과 물품 등을 전해주던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997년까지 42년간 한국을 찾은 재일동포 학생 야구인들만도 무려 620여명. 이들은 주로 남한 측의 재일거류민단 소속이었다. 영화 속 원로 야구인들은 '전후(戰後) 한국 야구의 도약은 재일동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입을 모으지만 야구팬을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에 대한 기억은 흐리다. 원래 도움 받은 기억은 쉽게 잊히는 법이다.
"조국에 대한 배신감? 글쎄, 그들에게 그런 감정은 없는 것 같아요. 간혹 '이것은 잘못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동포는 '우리는 남도 북도 일본도 아닌, 일본에 사는 자이니치(在日)'라며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게 더욱 안타깝죠"
다시 수차례 이어지는 '안타깝다'는 말. 애석하고 가슴 아픈 이 감정이야말로 김 감독이 고된 독립 다큐멘터리 작업을 계속 하게끔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감독은 원래 극영화를 찍던 촬영감독이었다. 카메라를 들고 영화판을 누비던 그가 다큐멘터리 연출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예기치 않은 결과였다. 감독의 이름을 세간에 알린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는 원래 2003년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故) 조은령 감독이 준비하던 작품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였다.
"원래는 그 친구가 감독이었고 저는 촬영감독이었어요. 재일동포를 다룬 극영화를 준비하다가 다큐멘터리를 찍어봐도 좋겠다 싶어 장소를 섭외하고 취재를 하던 중에 아내가 세상을 떠난 거예요."
'우리 학교'는 친북한계 재일본인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세운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큐멘터리다. 일본사회에서 온갖 차별을 받으면서도 조국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사는 그들의 모습이 마음을 울리는 맑은 이야기. 2007년 개봉한 작품은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아 공동체 상영까지 약 1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프로젝트 자체가 워낙 매력적이고 의미 있는 이야기라서 아내가 하던 일을 누군가는 계속했으면 했는데 다큐멘터리라는 게 극영화랑 참 달라서 연출자와 출연하는 주인공들과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연출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누군가가 이어받으려 해도 새로이 관계 맺기가 쉽지 않은 거죠. 시간도 걸리고 수고도 들고. 그러다 보니 촬영감독으로 함께 얼굴을 비치며 관계를 맺었던 제가 하는 게 빠르겠다 싶더라고요."
"본의 아니게" 들어섰다는 연출자의 길이지만 이후 그의 삶은 참 많이 달라졌다. 비영리 민간단체 '몽당연필'에서 활동을 하는 것도 변화 중 하나다. 몽당연필은 2011년 3월 동일본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조선학교 학생들을 돕기 위해 조직된 단체. 일본 방문을 계기로 조선학교 아이들과 인연을 맺어오던 배우 권해효씨, 가수 안치환씨 등이 주축이 돼 만들어졌고 영화를 찍으며 그들의 세계에 깊숙이 들어갔던 김 감독이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실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관계를 함으로써 이야기를 내는 거잖아요. 현실의 사람들이 주인공이고, 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그 삶을 작게나마 위로해주는… 극영화는 못하는 부분인 것 같고, 덕분에 배우는 것도 많아요. 그리고 그 세계를 많이 알게 될수록 관계는 더욱 깊어지게 되죠"
'그라운드의 이방인'을 찍게 된 계기도 '우리 학교'와 관련이 깊다. 사실 김 감독은 '롯데'의 성지,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야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조은성이라는 우리 프로듀서가 야구선수까지 했던 '야구광'이에요. 그 친구가 인터넷을 하던 중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관한 텍스트를 봤는데 '어, 이런 게 있었어?'라고 생각했대요. 야구를 굉장히 좋아하고 잘 안다고 자부했는데 그런 자신도 잘 모르던 역사가 있었다는 게 흥미롭게 느껴진 거죠. 그렇게 조금씩 취재해가던 중 재일동포 이야기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제게 조언을 구하고자 찾아왔어요." 처음에는 조언을 구하던 것이 나중에는 '감독을 해달라'는 부탁으로 이어졌다. '야구를 모른다'며 몇 번이고 고사하던 그가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은 "이대로 간다면 620여명의 재일동포 학생 야구인들이 한국 야구사(史)에서 영영 잊힐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서다. 누군가는 기록을 해야 하지 않을까. 묘한 책임감이 그를 움직였다.
영화가 무사히 완성된 것 또한 어쩌면 '우리 학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2008년 기획단계부터 시작해 꼬박 5년이 걸린 작업. 그중 가장 시간이 걸리고 힘들었던 일은 출연진의 섭외였다.
"영화에서도 짧게 나오지만 힘들게 연락이 닿았다 싶으면 '좋은 기억이 없다'거나 '그런 과거를 왜 이제 와 들추려 하냐'며 출연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연락을 하니 이상한 사기범죄 같은 게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많았고(웃음)."
지지부진하던 출연자 섭외에 물꼬가 트인 것은 조선학교를 다닌 이력이 있던 김근씨를 만나면서부터다. 영화 '우리 학교'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그가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료들을 모으는 데 큰 힘이 돼줬다.
그 밖에도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당초 4명으로 시작했던 작업이 예산절감 등의 이유로 나중에는 감독 혼자서 도일(渡日)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잠실야구장에서 시구를 성사시키는 일도 만만치 않았는데 한국 야구의 전설인 임호균 전 삼미슈퍼스타즈 투수가 큰 도움을 줘 겨우 이뤄낼 수 있었다. 여건상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 점도 아쉬움을 남긴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이 결승까지 오른 게 1974년, 1982년, 1984년 세 번이에요. 이 중에서 어떤 연도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냐가 관건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으로 결정한 거죠. 그런데 일본에서 출연자들을 찾다 보니 1974년에 한국에 오신 분들도 만나게 됐어요. 1974년이 어떤 해였나 하면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했던 육영수 여사가 스물세 살의 재일동포 문세광에게 피격을 당해 세상을 떠났던 해예요. 봉황대기 야구대회는 8월10일 무렵부터 시작하거든요. 경기가 한창일 때 사건이 일어났던 거죠. 당시 한국 사회는 모두가 '재일동포 나가라' '조총련 반대'를 외치고 있었어요. 그때 이 사람들이 야구장에 있었던 거예요. 물론 이분들은 대부분 민단 계열이었지만 그래도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 마음을 담고 싶었지만 잘 안 됐네요."
다큐멘터리, 특히 비주류·비상업을 지향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일을 한다는 것은 말마따나 '생활고를 각오하고' 하는 일들이다. 이 작품 하나로 엄청난 부나 명예를 얻으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숨겨진 역사를 알리는 일을 관둘 수는 없다. "이 영화가 대단히 흥행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요. 하지만 역사에서 잊힐 뻔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쨌든 기록으로 남겼잖아요. 누군가의 가슴속 맺힌 응어리들을 풀어주는 일이기도 했고요. 그런 의미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보람이 있죠."
흥행 욕심은 정말 없을까. "더 많은 관객이 찾아주신다면 당연히 더 좋겠죠. '우리 학교'를 10만명이 봐주셨으니 이번에는 딱 11만명을 목표로 잡아볼까요(웃음)."
He is… |
한국야구 도약 이끈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이야기 ■ 영화 '그라운드의 이방인'은 |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