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북미 한인사회 오늘(한민족경제권이 떠오른다)

◎미 서부에만 코리안 100만명/태평양연안 ‘한국풍’ 넘실/1905년 1,000명 캘리포니아 첫 이주/92년 LA폭동땐 한­흑갈등 빚기도/이젠 생활터전 가밴쿠버까지 확대미국 서부에 한인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초.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일자리를 찾은 이민자들이 노동자 생활에 실망하고 서서히 본토로 이주해왔다. 1905∼1907년 사이 모두 1천여명이 캘리포니아등 본토로 이주함으로써 한인 사회의 중심지는 호놀루루에서 샌프란시스코, LA로 점차 확대됐다. 주미 한국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지난 94년말 현재 미국 서부에 사는 한인수(체류자 제외)는 대략 60만명을 넘는다. 캘리포니아주에 가장 많은 51만8천명, 오레곤주 2만4천명, 워싱턴주 7만3천명, 네바다주 1만2천명, 아리조나주 1만명등이다. 여기에 주재원, 유학생, 관광객 등을 합치면 한민족이 미국 서부에 많게는 1백만명 정도 있을 것으로 추산하는 이도 있다. LA를 중심으로 미서부의 한인들은 최근 북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LA에서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국경을 넘어 캐나다 밴쿠버로까지 한인들의 생활본거지는 확대되는 추세다. 60년대 말에만 해도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는 한인은 1만여명에 불과했다. 주로 독립운동가 가족, 하와이 이민자, 청운의 꿈을 품은 유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다 서독 광부출신과 간호원들이 후발그룹을 형성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갔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조사에 따르면 78년말 당시 LA 거주 한인은 5만8천명였으나, 현재는 LA에만 30만명이 살고 있다. 이중 47%가 코리아 타운에 살고, 나머지 53%가 외곽지역에 살고 있다. LA 한인 타운의 성장은 불과 3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69년 LA에 한인들이 몰려살던 지역은 제퍼슨가 근처였는데, 굳이 코리아타운이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상권은 물론 커뮤니티 봉사단체나 주류사회와의 고리 역할을 할 조직도 변변히 없었다. 「고려정」이라는 한국식당이 하나 있었고, 쌀이나 한국 식품을 구하려면 제퍼슨가와 올림픽가에 있는 일본 식품점에 가야 했다. 그러다가 현재의 코리아타운인 올림픽가와 라파옛가 사이에 「나성제일식품」이라는 한국 식품점이 생겼다. 한인들의 발걸음이 자연 제퍼슨가에서 올림픽가로 옮겨졌다. 그후 77년께 올림픽가에 동양식품점이 들어서 서서히 한인 타운이 형성되어 갔다. 71년 LA에 대한항공 화물기가 취항하고, 다음해 여객기가 취항하면서 LA 코리아타운이 활기를 띠었고, 70년대말 이민이 급증하면서 한인타운은 모습을 드러냈다. 한인타운이 형성된 올림픽가에는 봉제공장이 있었다. 초창기 한인들이 봉제공장으로 유입된 것이 타운 형성에 큰 힘이 됐다. 한인 여성들은 봉제공장에서 억척스럽게 재봉틀을 돌렸다. 유태인이 대부분인 경영주들은 교육수준이 높고 일 잘하는 한국 여성들을 0순위로 취직시켰다. 점포 임대료가 쌌고, 버스를 한번 타면 LA 중심가로 갈수 있는 장점도 타운형성에 큰 도움이 됐다. LA 한인타운에는 이제 5∼6개의 한인 대형마켓이 요소요소에 자리잡고, 중소형 점포도 빼곡히 들어서 있다. 한인들을 상대한 업체들의 가격경쟁과 품질경쟁도 치열하다. 카페에서 노래방, 식당, 빵집, 룸쌀롱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볼수 있는 풍경을 느낄수 있다. 올림픽가에서 출발한 코리아 타운은 이어 윌셔가로 진출했다. 윌셔가에 진출함으로써 한인타운의 성격이 크게 변화했다.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으로 질적 변화를 한 것이다. 윌셔가의 빌딩에는 변호사, 공인회계사, 부동산업자, 은행, 의사등 전문 직종의 종사자들이 사무실을 차지, 한인타운의 두뇌역할을 하고 있다. 에퀴터블 빌딩을 비롯해 윌셔가의 빌딩 다수가 한인들의 수중에 넘어갔고, 건물주와 입주자가 모두 한인인 경우가 많아졌다. 코리아 타운의 확대는 다른 민족 특히 흑인들의 경계 대상이 됐고, 92년 이른바 LA 폭동은 그런 배경을 깔고 발생한 것이다. LA 폭동이후 한인들은 자경대를 조직, 타운을 지키고 있으며 올해내로 타운내에 자그마하지만 경찰서가 하나 들어설 예정이어서 타운의 안전에 한몫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92년 폭동은 LA 한인 사회의 전환점이 됐다. 그동안 노동집약적인 업종에 머물던 한인들은 기술집약적인 분야로 머리를 돌렸다. 프랜차이즈 업종등 전문업종과 상당한 자본력을 필요로 하는 하드웨어(철물점)등에 한인들이 속속 진출했다.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친 인터넷·컴퓨터 열기는 한인들로 하여금 첨단화, 전문화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했다. 통신분야, 컴퓨터 판매업소등도 90년대 들어 한인들이 새롭게 발을 들여놓는 분야다. 한인 타운의 확대는 한인 단체의 확대를 수반했다. 70년대초 불과 10여개에 불과했던 한인 단체는 현재 4백여개나 된다. 이들은 각분야에서 한인 코뮤니티의 응집력을 형성하고 있다. 60년대 이전에는 국민회, 동지회, 흥사단등 항일운동단체의 성격이 강한 단체들이 LA 한인사회를 엮었다. 62년에는 한인센터가 건립됐고, 65년엔 남가주 한인회가 조직됐다. 68년에는 남가주 남가주 한인회와 남가주 한인거류민회가 발전적으로 통합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인회의 취지가 퇴색했다. 급기야 72년에는 한인회 정화를 주장하는 인사들이 교포문제 연구회를 조직했고, 유사한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 서로 티격태격하기 일쑤였다. 한인 사회의 부정적 단면의 하나다. 캘리포니아 한인 사회가 1.5세대로 전환되면서 한미연합회, 한인청소년회관등 1.5세 단체들의 활동이 주목되고 있다. 특히 한미연합회는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에 주력하고 있다.<로스앤젤레스=김인영 특파원> ◎홀트아동복지회 어떤 곳인가/55년 미오레곤주 농부 홀트부부가 설립/42년간 한국고아 65,000여명 해외입양 재미 한인중에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인 양부모에 의해 성장한 사람들이 미국 곳곳에 터를 내리고 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6·25로 인한 전쟁고아를 위해 탄생한 조직으로 지금까지 42년간 약 6만5천명의 한국고아들이 해외입양을 했다. 그 상당수가 미국땅에 살고있는 것은 물론이다. 홀트 복지회는 지난 55년 독실한 크리스쳔으로 미서부 오레곤주에서 농사를 짓던 홀트 부부에 의해 창립됐다. 심장마비로 쓰러졌다가 새 생명을 얻은 홀트씨는 신이 자신에게 맡긴 사명이 한국의 전쟁고아돕기 임을 확신했다. 그 해 6월 그는 홀연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동방으로부터 온 자손」 8명을 입양하면서 홀트복지회의 스토리는 시작된다. 부부는 한국 어린이들을 오레곤 자택의 넓은 방에 키웠다. 그의 이야기가 매스컴을 통해 미국 전역에 전해지자 자선단체의 성금이 줄을 이었고, 두어달만에 입양희망자가 5백여명을 넘어섰다. 홀트부부는 한국 고아 입양을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홀트아동복지회를 조직, 56년 2월 오레곤 자택에 리빙룸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서울에도 사무실을 두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입양을 주선했다. 홀트씨가 65년 4월 심장병이 재발, 사망하기까지 9년동안 부모를 찾아준 한국 고아는 무려 3천1백명에 달했다. 그가 죽자 부인과 큰 딸 말리씨가 홀트복지회를 이어 한국고아 입양 사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인터뷰/“재미한인 1인당소득 한국인 평균의 2배 교포 경제실력 막강”/손창묵 워싱턴주 수석이코노미스트 『워싱턴주는 아시아에서 가깝기 때문에 환태평양 경제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워싱턴주의 수출물량 가운데 한국으로 가는 물량이 일본에 이어 두번째인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캐나다보다 많지요.』 워싱턴주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손창묵씨는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답게 통계를 꺼내놓고 워싱턴주와 한국의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설명했다. 지난 69년 연세대를 졸업한후 미국으로 건너와 뉴욕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손박사는 74년 뉴욕 주정부를 시작으로 일리노이주, 오레곤주를 거쳐 84년부터 워싱턴 주에 근무했다. 그가 현재 맡고 있는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주정부와 의회 사이에 중립적 위치에서 주정부 예산을 조정하는 장관급 자리. 연방정부의 연준리(FRB) 의장과 같은 역할이다. 『재미교포 1인당 소득은 한국인 평균 소득의 2배를 넘고 교포수를 1백20만명으로 잡을때 한국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6%에 해당합니다. 교포의 경제실력을 가볍게 보면 안됩니다.』 손박사는 환태평양 경제권이 확대되면서 시애틀은 아시아 국가들의 대미교역 거점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워싱턴주에는 아시아계가 20%를 차지하고 있고, 주지사도 아시아계이므로 아시아, 특히 한국과의 교역에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한국기업들이 미국에 진출할때 교포들을 적극 활용치 못하는 점을 애석해 했다. 현지 교포들이 미국 국내실정을 잘 알고 특히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이를 잘 이용하면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서 쉽게 활동할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손박사는 워싱턴주에만 있는 수석이코노미스트 자리를 네번이나 연임, 무려 13년동안 재임하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주정부와 의회, 민주당과 공화당의 공통된 지지를 얻고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인 사회가 소규모 자영업 위주로 운영되고 있으며, 동종업종에서 지나치게 밀집돼 있는 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올림피아(미워싱턴주)=김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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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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