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횡포에 정통부 ‘무소신·무대응’

◎업계 “정부 누구편이냐”/스웨덴사 제품 구매계획은 승인 지연 1년째/미 통상압력 지레겁내 ‘복지부동’ 구태 재연정보통신부가 미국의 루슨트 테크놀로지스 등 다국적 외국 통신장비업체의 횡포에 무대응으로 일관, 「레임덕」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루슨트 테크놀로지스가 국내 통신망환경에 적합치 않은 교환기를 설치하고 있는데도 정통부가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아 사실상 이를 묵인하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이 강하게 일고 있다. 한국통신이 지난해말 실시한 인증시험에서 루슨트의 교환기 「5ESS­2000」는 한국통신의 시내전화 교환기 규격중 ISDN(종합정보통신망)기능 등 17개 항목에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는데도 인천 연수전화국 등에 공급됐다.<본지 6월9일자 11면 보도> 이에 설치를 거부해야할 한국통신은 루슨트측에 「조속한 보완」만 요구하고 있고, 통신망 환경의 건전도 유지를 책임져야 할 정통부 역시 손을 놓고 있어 「정책 부재」를 여지없이 노출시키고 있다. 정통부의 무소신은 이뿐 아니다. 유사한 사례에 대해 이중의 기준을 적용하는 등 정책의 일관성마저 없어 스스로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정통부는 무선데이터통신 신규사업자인 인테크텔레콤이 지난해 10월 장비 구매선을 변경하겠다고 요청하자 『정부에 제출한 사업계획서(RFP)대로 이행하라』며 거부한 바 있다. 인테크텔레콤은 당초 미국의 모토롤러장비 구매를 전제로 사업계획서를 제출, 무선데이터통신 사업권을 땄다. 사업권을 획득한 뒤 모토롤러와 장비구매협상을 벌인 결과 가격·기술이전 등 조건이 맞지 않자 인테크는 스웨덴 에릭슨사의 장비를 구매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 정통부에 승인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통부가 『사업계획서는 대정부 약속』이라며 지금까지 승인을 거부하는 바람에 인테크는 사업권을 딴지 1년이 다 되도록 장비를 발주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솔PCS가 정부에 약속한 외국산 장비구매비율을 어기고 루슨트의 장비를 다량 구매하려는데 대해 정통부는 눈을 질끈 감아주고 있다. 한솔이 지난해 PCS(개인휴대통신) 사업권을 딸 때 제출한 사업계획서에서 제시한 국산장비 구매비율은 92%. 즉, 외국산장비는 8%만 사겠다는 대정부 약속이다. 그러나 한솔의 장비구매계획중 경남·북 전역에는 모두 루슨트의 장비가 깔린다. 한솔의 장비설치물량중 루슨트 장비는 교환기가 7대중 2대, 기지국이 1천4백70개중 3백62개로 전체의 25% 이상이다. 정부에 약속한 외산장비 구매비율을 크게 넘는다. 하지만 정통부는 한솔의 루슨트장비에 대해선 애써 문제삼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정통부의 황의환 부가통신과장은 『통신사업자도 기업인 한 전략과 계획을 수정할 수 있다. 한솔의 경우 불가피하게 수정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루슨트장비가 사업계획서상의 비율을 넘지만 그 정도면 국내 통신장비산업 육성이라는 목표는 달성됐다고 본다』며 중요 통신설비 설치승인을 곧 내줄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다. 이는 「상황변화」를 내세우면 「약속을 안지켜도 그만」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정통부가 인테크문제에 대처한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잣대를 루슨트에 적용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사례다. 무선데이터통신보다는 PCS장비가 통신망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훨씬 크다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통신업계는 정통부가 루슨트나 모토롤러 장비를 적게 구매했을 경우 미국 정부로부터 받을 통상압력을 지레 우려해 복지부동하고 있다는 지적이 강하다. 미국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구태가 재연되고 있다는 것. 정통부는 「통신시장이 개방됐으니 국내업체를 보호, 육성할 수 없다」며 「경쟁력 강화」를 운운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통부는 개방된 국내 시장에 들어온 외국업체를 과보호하는 듯한 인상도 주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같은 과보호로 국내업체들이 오히려 불이익을 볼 수도 있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지금 우리 통신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다.<이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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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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