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민주주의 갈수록 후퇴
"정책 개선" 집단 목소리 줄어들고 의회로비 등 개인 능력주의로 변질
"정당도 대중 필요로 안해" 꼬집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서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다는 미국 정치 교과서(We the People: An Introduction to American Politics)의 공저자 벤저민 긴스버그 교수와 존스 홉킨스 대학교 정치학 교수가 함께 펜을 잡았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이 왜 민주주의 축소(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를 겪고 있는지 조목조목 짚는다.
저자들은 이제'시민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고 역설한다. 이들은 엘 고어 미국 전 부통령이'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에서'시민'이라는 단어 대신 내뱉은'고객'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시민은 정부를 소유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존재인 반면, 고객은 정부로부터 그저 쾌적한 서비스를 받는 존재로 간주될 뿐이다. 시민은 공공의 목적을 위해 창조된 집단적 존재로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고객은 시장에서 개인적 필요를 충족하려는 개별 구매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들은'시민'이'고객'이 돼 버린 이 같은 현상에서 미국 민주주의가 뒷걸음질 치고 있는 이유를 찾는다.
정부는 이제 평범한 사람들의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지지에 의지하지 않고도, 전쟁을 수행하고 세금을 걷고 정책을 집행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은 유권자 대중을 주변화했고, 사적 시민들의 집합으로 해체시켰다. 저자들은 이를'개인 민주주의'(personal democracy)라 명명했다.
개인 민주주의는 집단적 공격으로만 돌파할 수 있었던 정치의 장벽을 낮추기도 한다. 정보 공개법, 공청회 의무화, 입법 예고제, 공공 기관의 전화 상담 서비스 등을 통해 시민들이 혼자서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외견상 시민 친화적으로 보이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같은"개인 민주주의가 외려 미국 정치에서 시민의 역할을 위축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대중 민주주의'(popular democracy) 처럼 한 목소리로 정치적 이슈를 제기하거나 질 나쁜 공공 정책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공공재를 직접 생산하거나 봉사활동(노숙자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 따위)을 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적 만족감은 얻을 수 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나 지역 사회에도 분명 일조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민주주의 실행과는 거리가 있다. 저자들은"결국 개인 민주주의는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능력을 가진'개인들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어떤 시민들은 정치에 불만이 있으면 혼자서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관료와 의회에 로비를 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처럼 능력을 가진 이들과 힘을 모아 집단을 조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시민들은 불만이 있어도 정치 행동에 쉽사리 나서지도 못한다. 이들과 함께 정치 정보를 해석하고 조직화 비용을 감당하며 행동에 나섰을 때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지원이 없다면 이들이 정치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과거에는 이 역할을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이 해줬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법적 구제를 받도록 보장했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정치 정보를 제공했다. 하지만 지금 유수의 평범한 유권자들은 정치에 불만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제 몫을 해내는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은"이 같은 현상이 결국 술 자리 정치 비평과 정치로부터의 무관심을 낳았다"며"대중이 정치에 무관심해진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들이 정치 동원의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포기한 것의 결과"라고 일갈한다. 정치에 참여하도록 권유 받지 않고 대신 정부 서비스를 받는 한낱 수혜자로 몰락했으며, 동시에 시민으로서의 존재감을 잃어버리고 있는 오늘날 기형적 민주주의 모습에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2만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