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디플레이션과 주가

이코노미스트지가 디플레이션(depression)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후 미국 증권사들이 `더블딥(이중침체)`이상으로 디플레이션의 발생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물가가 광범위하게 하락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현재 세계 경제 상황이 디플레이션을 우려할 정도까지 몰린 것은 무엇보다 경기침체의 역할이 컸다. 미국의 투자는 지난 7분기 동안 하락해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긴 침체기간을 기록하고 있다. 소비가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지만 고용이 불안정해 언제 줄어들지 모르는 상태다. 일본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지난 2ㆍ4분기에 2.6%의 성장을 기록했지만, 7월까지 소매 판매가 4.8%나 하락하는 등 침체가 지속되고 있다. 아시아지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디플레이션은 선진국과 원인이 또 다르다. 홍콩은 부동산 시장의 거품 붕괴와 함께 디플레이션이 시작됐다. 통화가치가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홍콩 당국은 디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통화팽창 정책을 펼 수 없었고, 이에 따라 디플레이션이 심화됐다. 또 다른 요인으로 홍콩의 디플레이션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부유한 홍콩과 인접한 광동성간의 소득 격차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후 광동성의 생산성은 홍콩에 빠르게 근접했으나 부는 그렇지 못했다. 이에 따라 광동성의 노동 및 저렴한 토지 비용이 홍콩으로부터 수요를 이끌어내고 있다. 정도는 약하지만 싱가포르와 타이완도 유사한 형태의 디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또 하나의 국가인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가 원인이 되고 있다. 중국의 디플레이션은 과잉 노동과 국영기업이 그 요인인데 특히 국영기업이 골치거리이다. 디플레이션은 공급이 많고 수요가 적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래서 해결 방법은 수요를 늘리거나 생산능력을 줄여주면 된다. 문제는 이 둘 모두가 만만치 않다는데 있다. 우선 수요를 늘리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물건 가격이 계속 떨어질 경우 소비자들은 오늘 써야 될 것을 내일로 미룬다. 최소한 가격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소비가 늘어날 수 있는데, 이런 믿음이 생기면 디플레이션이 발생하지도 않을 것이다. 수요 위축은 곧바로 기업의 수익성 악화로 연결되고 이는 다시 소비자의 소득 감소를 초래해 수요가 더욱 줄어들게 된다. 공급을 줄이는 문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요즘처럼 개방된 경제에서 공급 과잉을 줄이기 위해서는 국가간 또는 기업간 공조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런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예로 들어보자. 작년은 반도체 가격이 126메가D램이 1달러 밑으로 떨어질 정도로 최악의 공급과잉 상태였다. 당시에 공급 과잉 비율이 10% 안팎이었는데 모든 반도체 생산 기업들이 10%씩 만 덜 생산하면 가격이 정상으로 돌아갔을 텐데 이런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디플레이션이 주식시장에 미치는 악영향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기업실적이 급속히 나빠진다는 점이다. 가격은 공급자와 소비자가 협상해 도달한 합의점이다. 이 때 공급이 많아지면 공급자의 입지가 약해지기 때문에 기업들은 변동비만 커버할 수 있으면 더 낮은 가격으로 덤핑을 하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될 경우 기업은 이익 감소에 시달려 주가가 하락하게 된다. 둘째는 경기 둔화와 이를 막기 위한 정부의 노력을 무위로 만든다는 점이다. 물가가 상승하면 사람들은 실물자산을 더 가지려 하지만 물가가 하락하면 현금을 선호하게 된다. 이런 속성 때문에 중앙은행이 금리를 형편없는 수준까지 인하해도 투자자들은 몇 푼 되지 않는 이자에 만족하면서 돈을 쓰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1%도 안되는 이자를 받으려고 은행에 저금하는 일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도 그들은 현명한 처신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문제는 이럴 경우 정책의 효과는 거의 찾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세계경제에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 심각한 지경은 아니다. 무엇보다 세계무역이 디플레이션의 위험을 상당히 완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세계가 1930년과 달리 디플레이션 시대를 비교적 잘 버티고 있는 요인일지 모른다. 문제는 이런 제도적인 부분보다 인류의 경험이 적다는데 있다. 1700년대부터 보면 인류가 인플레이션을 겪었던 시간보다 디플레이션으로 고생을 했던 시간이 훨씬 길었다. 산업혁명으로 예기치 못할 정도로 많은 재화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인데, 불행한 것은 근래 60년간에 디플레이션을 제대로 경험한 정책입안자가 없다는 점이다. 경험이 없다 보니 많은 시행착오가 생길 수 밖에 없고, 이는 예기치 못하게 사태를 최악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이종우 미래에셋 운용전략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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