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이 도왔다. 만약 날씨가 좋지 않아 농업 생산량이 줄었다면 인도의 올해 성장률은 4%대로 추락했을 것이다"
지난달 26일 인도 뭄바이에서 만난 인도 최대 신용평가사 크리실의 이코노미스트 총책임자 비댜 마함바레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인도 정부, 국제통화기금(IMF) 등은 올해 인도의 경제성장률이 5%대 후반으로 올라갈 것이라며 10년 이래 최저를 기록한 지난해(5%)를 바닥으로 향후 경제여건이 나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마함바레는 인도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차지하는 농업의 일시적 호황에 따른 착시효과라고 지적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의 인도 자회사인 크리실은 현지에서 최고의 공신력을 인정받는 곳이다.
마함바레는 "올해의 성장은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 할 수 없다"며 "내년 총선이 끝나고 3개월 후가 인도 경제에 있어 가장 중대한 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 5월 총선을 앞두고 현 정부는 레임덕에 빠져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새 정부마저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인도는 본격적으로 저성장 국면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도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뒤흔들었던 2008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에도 6.7%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2009년과 2010년에도 각각 8.6%, 9.3%의 고속성장세를 이어갔다. 2000년대 이후 인도의 경제성장률이 4%대였던 것은 2002년이 마지막이었다. 만약 마함바레의 분석처럼 성장률이 한창 때의 반토막이 나고 본격 저성장 국면에 진입할 경우 다른 신흥국과 원자재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인도에 막대한 석탄을 수출하던 인도네시아는 인도의 석탄 수요가 줄어들면서 경상수지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인도인들의 삶 역시 팍팍해지고 있었다. 뭄바이에서 대리운전을 하는 아쇼크 티라크(24)씨는 "기름을 넣는 데 몇 달 전만 해도 58벅스(달러)가 들었는데 이제는 75벅스를 줘야 겨우 채운다"며 "물가가 너무너무(very very) 높다"고 말했다. 그는 고용시장에도 찬바람이 불어 주변에 일자리가 없는 친구가 많다고 덧붙였다.
인도 경기상황을 알아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묻자 운전 중이던 그는 차창 밖을 가리키며 "바로 지금 보이는 것이 인도 경제의 현주소"라고 말했다. 창밖에는 네다섯 명이 거대한 쓰레기더미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쓰레기를 일일이 손으로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시에서 쓰레기를 분리수거할 경우 주는 임금을 타기 위해 악취를 참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또 뭄바이 거리를 걸을 때는 채 열 살도 안 돼 보이는 소녀가 다가와 무릎 언저리를 툭툭 건드리며 구걸을 하는 등 뭄바이 서민의 상황은 아시아 3위 경제대국 경제수도의 시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비참했다.
비즈니스 환경도 악화되고 있었다. 인도 최대 은행인 스테이트뱅크오브인디아의 히라난다니지점 알파나 바르마 부지점장은 "요즘 영업하기 어떠냐"는 질문에 "돈줄이 말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출구전략 공포에 루피화 가치가 폭락하자 인도중앙은행이(RBI)이 루피화 유동성을 거둬들이며 대응하고 있는데 이것이 은행 영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가 위기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채 시중은행들만 쥐어짜고 있다"고 불만을 호소했다.
시중자금경색은 제조업에도 직격탄을 날리고 있었다. 인도상공인협회(IMC)의 샤일레쉬 비아디아 회장은 본사에서 기자와 만나 "제조업이 특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가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올해 15%에서 내년까지 최대 22%로 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으나 이 또한 흔들리게 됐다"고 말했다. IMC는 1907년에 설립돼 현재는 4만개의 인도 기업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으며 인도 재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구다. 실제 HSBC가 발표한 인도의 7월 제조업 구매자관리지수(PMI)는 50.1로 50개월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5일 발표된 HSBC 7월 서비스PMI는 47.9를 기록, 4년3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인도에서 서비스 부문은 GDP의 60%를 차지한다.
인도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온 외국인직접투자(FDI)의 급감도 인도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외국인 직접투자는 2003년 20억5,700만달러에서 2011년 318억6,500만달러로 15배 가까이 늘어났었다. 하지만 지난해 정부가 세법까지 개정해가며 영국 통신회사 보다폰에 40억달러에 가까운 거액을 소급과세하는 등 규제가 심해지자 외국 기업의 엑소더스는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실제 지난해 FDI는 전년보다 38%나 줄었다.
인도 지방자치단체의 힘이 막강하다는 점도 문제다. RBI의 B M 미스라 경제정책조사과장은 "중국은 중앙정부가 일괄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면 지방이 이를 따라가지만 인도는 다르다"고 밝혔다. 실제 포스코는 카르나타카주에서 추진하던 제철소 건설계획을 부지매입에 반대하는 현지 주민 때문에 최근 철회했다. 또한 최근에 출구전략 공포로 루피화 가치가 폭락하고 이런 현상이 고질적 경상수지 적자 문제와 맞물리며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 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당국이 쓸 수 있는 카드도 많지 않다. RBI는 루피화 가치 하락 때문에 경기부양을 위한 기준금리 인하는 고사하고 단기금리를 큰 폭으로 올리며 환율 방어에만 급급한 상황이며 재무부 또한 지난 회계연도에 재정적자가 사상 최고치(GDP 대비 4,8%)를 기록해 돈 풀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정부는 FDI 제고를 위해 지난해 9월부터 외국자본의 국내 기업 지분인수 상한선을 대폭 상향하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 또한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마함바레는 "정부가 수도관 속에 대기하고 있던 FDI를 인도 경제에 쏟아붓기 위해 잠갔던 수도꼭지를 열었지만 수도관 안에 복잡한 법 절차와 고질적인 뇌물문화 등 찌꺼기가 많아 정부 생각처럼 FDI가 늘어날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다음달 취임하는 차기 RBI 총재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라구람 라잔 재무부 수석경제자문(시카고대 교수)은 최근 "기업친화적인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며 "인프라 및 금융 시스템 개선과 산업 분야 간 연계 강화 등 구조적 문제가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