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리빙 앤 조이] "重力거부" 스카이스포츠의 세계




[리빙 앤 조이] "重力거부" 스카이스포츠의 세계 화성ㆍ문경ㆍ송도=서은영 기자 supia927@sed.co.kr 그래픽=이근길기자 관련기사 • "重力거부" 스카이스포츠의 세계 • 스카이 스포츠 시작하려면 • 날만한 장소 • 첫 여성 메인 뉴스 단독진행 김주하 • [피부이야기] 피부미인 송선미 비결 • 10년간 흡연? 40세 넘고? 폐기능 검사는 필수! • "버스 안에서 춤·노래 한국서만 볼수 있어요" >>리빙 앤 조이 기사 더보기 푸른 창공을 나는 것은 인류의 꿈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미노스왕이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를 궁에 가두자, 다이달로스는 이카로스의 팔에 촛농으로 깃털을 붙여 날개를 만든다. 그리고 하늘을 날게 해 탈출을 시도하지만 이카로스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나머지 촛농이 녹아내려 땅에 떨어져 죽고 만다.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은 신화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사람의 팔로 날개를 쳐서 날 수 있는 '오니솝터'라는 비행틀을 구상, 하늘을 날기 위한 기계를 연구한 첫번째 인물이 됐다. 이후 독일의 릴리엔탈은 1877년 글라이더를 시험제작, 1891년 처음으로 비행에 성공했다. 그의 비행으로 활공과 양력에 관한 이론이 발아(發芽)했지만 릴리엔탈은 1896년 시험비행중 추락사했다. 하지만 그의 성과는 후일 라이트 형제가 동력비행에 성공하는 토대가 된다. 하늘을 날고픈 욕망이 서양 사람의 전유물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조선 철종(1831-1863)때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비행기에 관한 비차변증설(飛車辨證設)이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는 중국과 일본 등 다른 나라의 비행기술이 적혀 있으며, 우리나라에 관한 것으로는 임진왜란때 영남의 어느 성이 왜군에게 포위 당했을 때 그 성주와 친분이 두텁던 사람이 비차(飛車)를 만들어 타고 성안으로 날아 들어가 성주를 태우고 30리 밖으로 날아 나와 인명을 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상은 바뀌어 이제 비행기를 이용한 여행은 일상이 됐다. 하지만 공기의 저항과 그로 인한 양력을 느끼며 하늘을 날고 싶은 꿈은 아직 진행중이다. 그럼에도 열에 아홉은 하늘을 날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있어도 그 꿈을 포기한다. 첫째가 위험하다는 생각에, 둘째가 비용이 많이 들어서다. 그렇다면 꿈을 가로막는 첫번째 이유부터 생각해 보자. 스카이 스포츠가 위험하다는 것은 오해다. 5,000시간 비행기록 수립을 앞두고 있는 박문주(36) 초경량비행 교관은 "비행고도와 위험은 무관하다"며 "가끔 들려오는 비행 사고 소식은 자기 능력을 과신해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비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최적의 기상조건 아래 익숙한 지형에서 비행을 한다면 위험할 게 없다는 얘기다. 곡예비행을 즐기는 그지만 한 번도 부상을 당해 본 적이 없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말도 핑계다. 비행을 시작하면 초기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보통 200만~400만원이 교육비로 들어간다. 행글라이딩이나 패러글라이딩 장비는 100~300만원, 초경량 비행기의 경우 1,000만원 이상의 비용이 든다. 하지만 한 번 배워 놓으면 평생 비행 능력을 잃지 않고 자신이 원할 때 하늘을 날 수 있으니 그 정도의 비용은 감당할 만 하다. 가격이 정 부담스럽다면 대여하거나 중고를 구입하면 된다. 스스로 기류와 지형을 읽고 몸을 움직여 비행을 하는 패러글라이딩부터 30초~1분간의 무중력을 체험하는 스카이다이빙, 폼 나는 초경량비행기까지 하늘을 나는 법은 무궁무진하다. 지금은 비행 마니아들이 꼽는 최적의 비행 시즌이다. 지상과 하늘의 온도 차이가 크지 않아 대기가 안정적이면서도 바람이 적당해 초보자들도 안전한 비행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주 리빙앤조이는 비상(飛上)을 낙으로 사는 이들을 만나봤다. 그들이 말하는 '무중력 예찬론'에 귀 기울이다보면 어른이 되며 접어뒀던 비상의 꿈이 다시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을 난다고 모두 다 위험하랴?" ‘하늘을 나는 꿈’에 매달려 사는 이들은 “일단 한번 시작하면 인생의 전부가 되 버린다”며 스카이 스포츠의 강한 중독성을 주장한다. 여기 그 중독성을 몸소 입증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즐기다 보니 비행이 취미 이상의 직업이 돼버린 사람들이다. 김승기 패러글라이딩 교관, 박문주 초경량비행기 교관, 황현우 스카이다이빙 교관을 하늘 중독자로 만들어버린 ‘비상’의 매력은 무엇에 있을까. ■1,803번 비행의 기록 “지금까지 1,803번을 뛰어내렸습니다.” 황현우(41)씨는 국내 유일의 스카이다이빙 교육장인 대한낙하산학교의 교장이자 스카이다이빙 프로 선수다. 국내 대회에서는 우승을 도맡아 했고 월드 리그에도 꾸준히 참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87년 스카이다이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후 스카이다이빙을 멈춘 것은 군대에서 보낸 2~3년의 뿐이었어요. 그 외의 시간 동안은 시간과 자금만 허락하면 미국, 호주 등지로 달려가 교육을 받고 실력을 배양했죠.” 황 씨가 스카이다이빙을 업으로 삼은 것은 불과 3년 전이다. 그 무렵 주로 지방 도시에 빌라나 소규모 아파트를 짓는 건축업자였던 그는 99년부터 계획해왔던 스카이다이빙 교육기관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사비를 털어 한 대에 500만~600만원 하는 장비를 5대 구입했다. 하지만 막상 학교를 운영하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는 데는 제약이 많았다. 스카이다이빙을 제대로 즐기려면 해발 4,000m이상으로 고공비행을 해야 하는데 대부분이 군 공역에 해당, 비행 허가 절차를 밟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 행정처리 과정에서 지체되기 일쑤였다. 또 비행기 값도 고가인데다 정비 비용이 비싸 국고지원이나 기업체 후원 없이는 운영이 어려웠고, 이ㆍ착륙을 할 만한 비행장도 없을 뿐더러 기존 지방 비행장을 이용하려면 이용료가 턱없이 비싼게 현실이다. “스카이다이빙도 하나의 문화사업입니다. 국제대회에 나가보면 미국, 호주, 유럽 같은 나라들은 국가 지원을 받거나 업체에서 후원을 받아 참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우리는 국내에서 외면 받죠.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의 꿈은 호주도 미국도 아닌 대한민국의 하늘을 나는 것이다. “4,000m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산과 강,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데 이런 경치가 어디 있나요. 전 우리나라에서 뛰어내리는 게 좋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지 외국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하루 빨리 국내에서도 스카이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기류에 몸 맡기고 활공하노라면 회원간 유대감 더욱 끈끈해져 “○○○회원! 오른쪽을 당기세요. 멀리 나가시면 안 됩니다. 착지하실 땐 양손으로 기체를 당겨주세요. 잘 하셨습니다.” 수원시 패러글라이딩 연합회 소속 ‘골드윙’ 클럽의 사무장이자 교관인 김승기(41) 씨는 매주말이면 클럽 회원들과 함께 전국 각지의 활공장을 찾는다. 활공장에 있을 땐 그의 손에 어김없이 무전기가 들려져 있다. 회원들이 비행을 할 때 원하는 대로 방향을 잡고 움직일 수 있게 지상에서 지도를 하기 위해서다. 김씨는 “다른 회원들 비행을 도와주는데 여념이 없어 정작 나 자신은 비행할 시간이 없을 때도 많지만 ‘이 좋은 걸 같이 즐겨야 더 좋지’ 하는 생각에 직업이자 봉사로 교관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교관의 본업은 수원시 팔달구청의 공무원이다. 하지만 그의 본업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패러글라이딩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7년 전 예비군 훈련을 갔는데 같이 훈련 받는 사람 중에 패러글라이딩 교관이 있더군요. 비행 얘기를 듣고 귀가 솔깃해져서 따라가봤죠. 3개월 만에 교육과정을 수료했고 그 후에도 매일 퇴근 후 비행연습을 했어요. 비가 오는 날이면 다른 사람의 비행을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연구했죠.” 불과 1년 2개월 만에 파일럿 자격증과 교관 자격증을 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패러글라이딩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실력이 좋아질수록 다른 사람들도 패러글라이딩을 제대로 즐길 수 있게 교육을 시키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며 교관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행이 좋아서 패러글라이딩을 즐기지만 결국엔 사람이 좋아서 비행을 더 즐기게 된다고 말한다”며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패러글라이딩 하는 게 이래서 행복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어요. 얼마 전에 회원 16명 정도가 함께 평창에 갔는데 한 시간 동안 비행을 하면서 16명이 동시에 하늘에 떠서 무전으로 수다를 떨었어요. 별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모든 회원들이 ‘우리가 이런 순간을 위해서 패러글라이딩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날 비행 후에는 뭔가 회원 간에 끈끈한 유대감이 더 커진 걸 느낄 수 있었어요. 함께 하늘을 날았다는 유대감 말이죠.” 푸른하늘 위에서는 내가 가는 곳이 바로 길 “비행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시련이 많았지만 오직 비행기만 바라봤기에 결국은 조종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민간인 곡예비행사인 박문주(36) 초경량비행스쿨 애어로마스터 수석교관. 그가 처음 파일럿을 꿈꾼 건 고등학생 시절 영화 ‘탑건’의 주인공 톰 크루즈를 보고 나서였다. “가죽잠바에 검은색 보잉 선글라스. 그 영화를 보자마자 ‘내가 할 일이 바로 저거다’라고 생각했죠. 그때 공군사관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첫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공사에 불합격한 것이다. 그는 재수를 하는 대신 군입대를 했고 비행에 대한 꿈을 접으려 했다. 하지만 포기는 이미 불가능했다. 비행 이외의 길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제대 직후 2~3년간 돈을 벌어 비용을 마련했고 캐나다 비행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를 마치면 귀국해 항공사 파일럿이 될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가 8~9개월 째 교육을 받고 있을 무렵 한국에 외환위기가 터졌다. 환율이 급격히 올라 두 배 가까이가 됐고 부족한 생활비를 신용카드로 메우던 박 교관에게 두번째 위기가 온 것이다. 결국 그는 다시 돌아오겠다는 결심으로 귀국했고 국내에 돌아와서도 돈을 벌며 환율이 떨어지기 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우연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국내 초경량항공기 비행장이 소개되는 것을 봤고 국내에서도 비행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에게도 한 가닥의 희망이 생겨난 것이다. 그는 곧장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비행장 연락처를 알아냈고 교관 교육을 받아 정식 비행교관이 됐다. 박 교관은 “시련이 있을 때마다 괴로웠지만 결국은 초경량 항공기 교관이 되라는 팔자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시련에 아랑곳 않고 조종사 일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그가 끊임 없이 길을 찾았기에 결국 조종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이 직접 운영하는 비행학교의 수석교관이고 5,000시간의 비행시간 기록을 불과 몇 시간 남겨두고 있는 베테랑 조종사다. 박 교관은 “비행을 할 때 만큼은 무한한 자유를 느낀다”며 “도로에서는 차선을 따라 움직이고 신호를 지켜야 하지만 하늘에서는 내가 가는 길이 바로 길이 된다”며 비행의 매력을 설명했다. 입력시간 : 2007/11/0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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