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31일] 스트레이트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Straight). 구한말 한성(서울)에서 근무한 미국 외교관이자 국제금융인이다. 1880년 1월31일 뉴욕에서 태어난 그의 첫 직업은 청나라 해관(세관) 촉탁직원. 선교사인 부친을 따라 일본에서 소년시절을 보내며 한자를 익혔던 덕분이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을 때는 AP와 로이터통신 특파원으로 전쟁터를 누볐다. 취재차 1904년 봄 방문한 한성에서 그는 미국 공사관 부영사로 주저앉았다. 외교관으로서 가장 신경을 썼던 업무는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엘리스에 대한 영접. 여행을 좋아했던 엘리스가 일본을 방문 중인 태프트 육군장군 일행에서 몰래 빠져나와 서울을 찾았을 때 고종 알현을 포함한 국빈대우를 하도록 대한제국을 움직였다. 대한제국이 일말의 기대를 갖고 말괄량이 아가씨를 환대할 때 일본에서는 가쓰라-태프트 밀약(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상호 인정한다는 비밀협정)이 맺어졌다. 엘리스 방문 직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뒤 미국이 가장 먼저 공사관을 폐쇄하는 바람에 귀국한 그에게는 출세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만주 지역 총영사직에 앉혔다. 모건은행에도 영입돼 중국 철도 건설을 위한 다국적 차관단의 대표까지 맡았다. 재벌가의 상속녀와 결혼하고 1차 대전에 자원 참전하는 등 스페인 독감으로 1918년 사망하기까지 그는 화제의 인물이었다. 스트레이트가 주도한 대중국 차관은 아시아에 대한 미국 ‘달러 외교’의 효시로 꼽힌다. 스트레이트가 달러를 무기로 극동 지역을 주름잡은 지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달러 외교에 중국까지 끼어들었지만 변하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여전히 외국의 눈치를 보는 한국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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