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9일] 로잔회의


1932년 7월9일 스위스 로잔. 영국과 프랑스ㆍ이탈리아ㆍ벨기에ㆍ일본 등 1차대전 승전국과 패전국 독일이 23일간의 회의를 마쳤다. 결과물은 독일의 전쟁배상금 경감을 담은 로잔의정서. 1차대전 직후 1,320억 금마르크로 정해진 후 도스안과 영안을 거치며 1,210억 라이히스마르크(명목지폐)로 줄어들었던 독일의 전쟁배상금이 총액 30억마르크로 떨어졌다. 현금배상은 물론 석탄이나 목재 같은 현물과 설비까지 뜯어가겠다던 연합국이 경감을 결정한 이유는 세계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어려워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럽 각국이 독일에 선심을 쓴 진짜 이유는 대미 압박. 대독 배상금을 깎아줬으니 유럽 각국이 미국에 진 부채 119억달러도 대폭 경감해달라는 요구가 로잔의정서에 깔려 있었다. 회의 참가국들은 결과를 낙관했다. 후버 대통령이 세계경제의 동반 침체를 감안해 연합국의 대미 전쟁채무를 1년간 유예해준다는 후버 모라토리엄을 선언(1931년 6월)한 마당에 추가적인 채무삭감이 가능하다고 내다본 것이다. 기대는 완전 빗나갔다. 미국은 탕감은 물론 삭감 논의에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로잔의정서는 각국 의회의 비준도 못 받고 효력을 상실한 채 불안감만 증폭시켰다. 사실상 배상 책임에서 벗어난 독일에서도 배상에 대한 불만이 쌓여 히틀러의 집권을 도왔다. 종전에서 로잔회의까지 14년을 끌어온 배상 협상에서 각국 정부가 허탕친 형국이 돼버린 가운데 스타가 나타났다. ‘평화의 경제적 귀결(1919년)’을 통해 가혹한 배상을 비판한 케인스의 선견지명이 확인된 뒤 1936년 펴낸 ‘고용과 이자, 화폐에 대한 일반이론’은 공황을 타개할 비책으로 각광 받았다. 로잔회의가 성공했다면 케인스는 경제학의 중심으로 군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