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시론/7월 30일] 벤치마킹 대상된 한국기업

지난 5월 중순 세계적인 통신기업 텔레콤이탈리아의 대규모 임직원이 혁신활동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삼성전자ㆍ엘지전자ㆍ포스코 등을 방문했다. 이들은 한국기업의 혁신활동을 높이 평가, 혁신 성공에 필요한 리더십에 대해 꼼꼼하게 질문했다고 한다. 텔레콤이탈리아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매출액만 31조에 이르고 종업원 8만명이 전세계를 대상으로 통신과 미디어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글로벌 그룹이다. 우리 기업들이 벤치마킹의 대상이 된 것은 해외 대학과 언론ㆍ연구기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업의 성공사례는 하버드ㆍ스탠퍼드 대학 등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모범적인 경영 사례 연구자료로 활용하고 있고 분석 기관들은 경쟁력과 기업 이미지, 브랜드 가치를 갖춘 기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벤치마킹은 이제 중ㆍ고생에게까지 익숙한 용어가 됐지만 원래 뜻은 ‘측정을 위한 기준점’이다. 이는 기업이 하고 있는 업무 중 혁신 또는 업무를 세계에서 가장 잘하고 있는 최고 기업의 수준과 비교해 그 격차를 창조적 모방을 통해 해결해가는 기법이다. 이러한 벤치마킹을 처음으로 실천한 기업이 미국의 제록스다. 제록스는 복사기시장에서 독점적 위치를 유지해왔으나 1976년 혜성같이 나타난 일본의 캐논이 품질ㆍ기능ㆍ디자인에서 제록스보다 나은 제품을 제록스의 생산원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면서 시장을 순식간에 잠식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제록스는 캐논의 디자인ㆍ가격정책ㆍ원가관리ㆍ제조판매과정을 제록스와 각각 비교, 혁신의 핵심 대상과 과제를 도출하고 개선을 추진한 결과 큰 성과를 거뒀다. 이후 GE, 3M도 이 기법으로 동일한 성과를 거두자 미국과 전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우리 기업이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 기업이 벤치마킹할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은 그동안 선두주자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정하고 후발주자의 이점을 활용해 모방과 학습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선도기업이 되면서 더 이상 모방할 상대가 없어졌기 때문에 스스로 산업을 주도하고 기술을 선도하며 혁신적인 경영 방식을 고안해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더욱 심각하게 우려되는 점은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우리 기업의 경쟁력과 실적이 최고점을 지났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경영도서의 신기원을 이룩했던 톰 피터스와 로버트 워터만의 ‘초우량기업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초우량기업으로 선정된 기업의 대부분이 책이 발간된 후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시간차도 한 가지 이유로 지적된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지적했듯이 한 문명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는 이미 성장기를 지난 상태다. 기업의 성공과 번영을 가져온 전략이나 처방은 오늘 도입해서 내일 성과가 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새로운 시도가 기업의 성과로 나타나고 학자들에 의해 연구돼 알려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성과가 일반에 알려질 즈음이면 해당 기업은 이미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거나 내부적으로 성공에 자만해서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동력을 잃었거나, 최소한 절박성을 잃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과거의 성공은 빨리 잊고 새롭게 다가온 도전을 직시해야 한다. 과거 초우량기업이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과거의 성공을 잊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경제여건에서 우리 기업들이 과거의 성공에 도취돼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도전을 인식하지 못하면 곧 바로 발육 정지 상태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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