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및 러시아 현지 금융경색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긴급 운전자금 조달선이 막힌 국내 기업들이 잇따라 휴폐업하고 있다.특히 기업 규모가 상대적으로 영세할 수 밖에 없는 식품가공, 공예품, 귀금속업종 등에서 휴폐업 사례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재정경제부에 따르면 지난해 11월말 현재 국내 기업들이 중국에 직접투자한 실적은 3,718건, 38억2,000만달러에 달하며 러시아에 직접 투자한 실적은 93건, 1억5,100만달러에 달한다.
이 가운데 절반이상은 국내의 고임금, 고물가 등을 피해 중국 및 러시아로 생산기반을 이전시킨 중소기업들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 중국 및 러시아 현지 금융경색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는 곳이 바로 이들 중소기업체다.
중국 청도에 진출한 H식품, CH식품, J공예 등은 현지 금융접촉이 불가능해지면서 심한 자금난을 겪자 최근 공장 가동을 중단한 상태.
이밖에 상당수의 현지 진출 기업들은 운전자금 고갈로 정상적인 조업활동을 포기한 채 생산라인 일부를 놀리고 있으며 조업시간도 단축하고 있다. 이러다보니 자금난으로 부도 위기에 몰린 기업들 가운데 심한 경우는 야반도주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진달(朴鎭達) 무역협회 IMF대책팀 차장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현지 금융기관들 사이에서는 한국 기업을 「대출지원을 하기에는 위험한 기업」으로 인식하고 있다』며 『특히 한국의 일부 기업들이 자금난으로 야반도주했다는 소문이 유포되면서 기업규모가 적은 중소기업들에 대해서는 신규 대출을 전면 중단시키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현재 중국 및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한국과 이뤄지는 무역신용장(LC) 거래에 대해 현지 금융기관이 무역금융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 것.
이 때문에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상당수는 한국과 무역신용장 거래를 할 경우 일시적인 자금경색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산업용 벨트류를 전문 생산하는 한국벨트의 중국 청도법인인 청도한국벨트유한공사가 대표적인 사례.
이 회사는 LC의존도가 전체 무역 거래의 70~80%에 달하고 있으나 최근 현지 금융기관이 한국에서 발행된 LC를 네고 대상에서 제외시킴에 따라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 이 회사의 현지 부책임자인 차동철(車東哲)부장은 『현지 금융기관에게 무역금융 지원을 요청했으나 담보를 요구하거나 풀마진(신용장 거래 금액만큼의 현금을 예치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신용장 결제시점까지 일시적인 자금공백을 감수할 수 밖에 없어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현지 금융기관들이 우리 기업들에 대해 일부 우량 대기업을 제외하면 운전자금의 신규대출 지원을 전면 거부하고 있는 것도 자금난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최근 중국 청도의 공장을 확대 이전한 니트의류 수출업체 팬코(전성훈·全成勳)는 공장 설립후 초기 운용자금 확보가 필요했으나 현지 금융기관의 자금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자 한국 본사로부터 운용자금 일체를 조달받았다.
이 회사 이기덕(李起德) 업무부장은 『당초 계획은 200만~250만달러 정도만 투자하면 공장을 설립, 현지금융 활용 등으로 정상 가동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했다』며 『하지만 공장 설립 후 현지로부터의 운전 자금 조달에 차질을 빚어 본사로부터 추가 자금을 투입, 총 400만달러를 투자했다』고 말했다.
팬코의 경우 국내 모기업의 자금사정이 비교적 넉넉해 최근의 위기상황을 가까스로 피해갈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중소기업들은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일부 기업들은 이 때문에 당초 현지 진출의 목적과 달리 최근에는 단순 임가공무역에 주력, 현지 금융에 의존하지 않는 여건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주통상의 중국 현지법인인 청도한주복장공사(총경리 이전호·李全鎬)는 모기업의 부도로 자금지원이 어려워진데다 현지 금융기관이 무역신용장 개설에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자 임가공 무역으로 전환했다.
이 회사 李총경리는 『자금경색을 타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임가공 중심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며 『그나마도 한국의 내수시장이 부진해 공장 가동률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고 말했다.【김형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