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는 판검사나 의사 등 기존의 성공 잣대가 됐던 사회 기준들이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느 분야에서도 1등을 하게 되면 남부럽지 않은 성공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는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심어주는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가치들이 확산되면 그동안 다소 소홀하게 취급했던 사회 분야에서도 성공사례가 쏟아지고 결국 현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창조경제도 저절로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영(60·사진) 서울산업진흥원(SBA) 대표는 지난 8일 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집무실에서 가진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조경제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힌 성공 가치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사회적인 성공 기준이 판검사나 의사에만 머물지 않고 과학 분야는 물론 예술 등 어떤 분야에서든지 최선만 다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성공에 대해 사회 전체가 박수를 쳐주고 격려하며 인정을 해줄 때만이 한국판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립자)도 나오고 세계적인 곤충학자 장 알리 파브르나 조앤 K 롤링(해리포터 작가)과 같은 세계를 호령할 창의적 인재들이 나올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대표는 이 같은 창의적 사고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적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국내에서 벤처를 한다는 것은 한순간에 신용불량자로 추락할 수 있는 정도의 굉장한 리스크를 떠안고 시작해야 한다"며 "이 같은 리스크를 사회가 함께 줄일 수 있어야 벤처도 활성화된다"고 힘줘 말했다. 벤처를 시도하다가 실패할 경우 개인이 혼자 감당하도록 내버려둘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감당할 수 있도록 안전망을 갖춰야 한다는 얘기다. 국내에서는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 분위기가 활성화돼 있지 않기 때문에 처음 아이디어를 구상한 사람이 빚을 내서 사업을 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벤처를 시도하다 실패하면 신용불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례가 다반사다. 여기에다 국가의 복지체계도 미흡해 실패한 벤처인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반도 취약한 상황이다. 이 대표는 "벤처를 하다 실패를 해도 언젠가는 다시 활용할 수 있는 경험이 남기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는 손해라고 볼 수 없다"며 "실패한 벤처인들이 다시 도전하게끔 사회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안전망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창업육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얘기하지만 실리콘밸리를 떠받치고 있는 정책이나 인프라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며 "실리콘밸리에서는 2~3번 실패한 사람에게도 돈을 대주고 기다려주고 해서 성공시키는데 우리는 리스크를 온통 개인에게 부담시키고 있어 실패 회피 심리가 너무 팽배해 있다. 이 같은 분위기를 바꿔줘야 벤처도 활성화되고 궁극적으로 정부가 추구하는 일자리 확대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새로운 사회적 가치 확산을 위해서는 교육체계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과 같이 남들 한다고 사교육을 통해 선행학습에 매달리면 아이의 경쟁력이 도태된다는 게 이 대표의 지론이다. 이 대표는 "지금처럼 부모들이 이끄는 대로 사교육이나 선행학습을 하고 진로를 선택하게 되면 아이들이 엄청나게 불행해지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차라리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자주 다니며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습관을 길러주는 게 훨씬 더 유익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암기공부만 한 아이와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을 다니면서 상상력을 키운 아이는 지적능력에서 4배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고 이 대표는 덧붙였다.
이 대표는 "앞으로는 아이가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부모가 찾아주고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이런 환경들이 모여 사회적 가치를 바꾸는 데 일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표의 이 같은 지론은 자신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대표는 원래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교수 출신인데 벤처캐피털(VC) 회사인 포스텍기술투자 대표를 거쳐 지난 2012년 5월15일 SBA로 자리를 옮겼다.
벤처캐피털 대표만 무려 15년(1997~2012년)을 맡아왔기 때문에 미래의 기술 흐름이나 사회의 변화를 집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났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아름다운 가게' 대표 시절 알고 지내던 이 대표를 SBA로 불러들인 것도 사회 변화를 정확히 파악해내는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SBA는 기술력을 갖춘 벤처업체를 발굴해 지원해줌으로써 경제의 뿌리가 되는 중소기업 생태계를 튼튼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창업을 준비하는 대학생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판로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에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SBA는 이 대표 취임 이후 운영방식이 180도 달라졌다. 이 대표 취임 전까지만 해도 업무의 99%가 수탁과제였다. 짜여진 예산집행만 하는 역할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표 취임 이후 업무의 50% 이상이 창업과 관련된 발굴과제이고 내용도 다양해지고 있다는 평가다. 한 예로 SBA는 기술력을 갖춘 잠재력 있는 기업을 벤처캐피털과 함께 발굴해 투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과거에는 기술창업 오디션 등을 열어 유망기업을 선발하면 사무실과 초기 지원금만 주는 선에서 그쳤는데, 이제는 벤처캐피털이 직접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는 식으로 바꿨다. 8개 민간 벤처캐피털과 협약을 맺고 총 43억여원을 투자금으로 확보해놓고 있다. 실제 엔피코어와 아이에스엘코리아는 SBA가 벤처캐피털과 함께 현장기업을 발굴한 것인데 벤처캐피털이 각각 2억원과 10억원을 추가로 투자하는 성공사례를 남겼다.
이 대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벤처육성 대책은 사무실을 싸게 임대해주고 약간의 자금지원을 해주는 초보적인 수준이었다"며 "그러나 최근 들어 벤처캐피털과 투자연계형으로 창업기업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말했다. 음악시장을 예로 들면 이미자 등 원로 가수들이 데뷔할 당시에는 노래만 잘하면 됐지만 이후 시대가 발전하면서 기획사가 붙어 아이돌을 탄생시키고 최근에는 세계적인 작곡가들이 가세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벤처지원도 음악시장처럼 단계를 높여갈 필요가 있다는 게 이 대표의 지론이다.
이를 위해 정부 차원의 지원도 역설했다.
이 대표는 "공공일자리 투자는 지속성을 갖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예산을 갖고 있는 정부가 앞으로 어떤 산업을 육성할 것인지를 놓고 전문가들과 진지한 토론을 한 후 방향을 정하고 방향이 결정되면 집중적으로 지원을 해야 양질의 일자리가 탄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시경쟁력은 역사 등 내재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모이게 하면 미국의 실리콘밸리처럼 인더스트리(산업)를 확 바꿀 수 있다"며 "서울은 정보기술(IT) 기반이 세계 최고 수준이고 제조업 기반도 좋아 벤처를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 비자 절차만 완화해줘도 외국인들이 몰려들어 다양한 벤처창업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BA는 법무부 등에 외국인들이 서울에서 활발하게 창업을 할 수 있도록 비자규정을 완화해줄 것을 요청해왔고 결과물로 이번주 중 비자완화 등의 내용을 담은 양해각서(MOU)를 체결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는 "앞으로 도시 경쟁력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어떻게 모으고 어떤 성과를 내느냐에 달렸는데 이런 측면에서 서울은 상당한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며 "정부도 이 같은 점을 감안해 지원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세계 선진국들은 도시경쟁력 강화를 위해 재창조 수준의 전략을 짜고 있다. 영국은 산업의 패러다임을 창조산업으로 바꾼 지 오래고 베를린은 전세계 미술인들을 끌어모으는 데 노력한 결과 기존 미술가들의 도시인 파리를 능가할 정도다. 미국 동부의 뉴욕도 최근에는 창업 인재들을 끌어들여 실리콘밸리 못지않은 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 제도개선 등에 나서고 있다.
이 대표는 서울의 도시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론의 하나로 벤처육성을 꼽는다. 벤처육성은 곧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이 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2000년대 초반 벤처 붐이 한창 일었을 때처럼 일반인들이 대거 가세한 묻지마식 투자 분위기가 조성되는 데에는 부정적이다. 이 대표는 "벤처기업 10개를 육성하면 그 중에서 성공하는 것은 많아야 1~2개 정도에 그칠 정도로 굉장한 리스크를 갖고 있다"며 "이 때문에 벤처투자는 전문가들이 투자를 해야지 일반 투자자들이 투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바람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SBA도 기술을 보는 안목과 자본을 갖춘 벤처캐피털과 손잡고 투자를 활성화하는 분위기 조성에 심혈을 쏟고 있다.
SBA는 최근 사명을 서울통상산업진흥원에서 '통상'을 빼고 서울산업진흥원으로 바꿨다. 이 대표는 그 이유에 대해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SBA는 최근 서울을 4~5개의 기술집적 클러스터로 디자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서울시가 구상하고 있는 홍릉지구의 안티에이징 산업 클러스터와 상암DNC의 문화콘텐츠 클러스터, 마곡지구의 연구개발(R&D) 클러스터 개발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역할을 SBA가 맡고 있다.
He is …
△1954년 서울 △1972년 경기고 △1976년 서울대 전자공학과 △1979년 KAIST 전기공학과 석사 △1983년 파리 콩피에뉴공과대 전산학 공학박사 △1985년 콩피에뉴대 전산학 국가박사 △1986년 포항공대 전자계산소장 △1990년 포항공대 정보통신연구소장 △1996년 포항공대 연구처장 △1997년 포항공대 창업보육센터장 및 포스텍기술투자 사장 △2002년 포스코 신사업본부장 △2008년 포항공대 기술사업화 센터장 △2012년 서울산업통상진흥원 대표
김호길 포스텍 초대총장·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2명의 멘토가 나를 키웠죠"
박원순 시장과 인연으로 SBA 선택
이전영 대표는 사회진출 이후에 2명의 멘토를 만났다. 김호길 포스텍(옛 포항공대) 초대 총장과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이 그들이다.
이 대표는 1980년대 초반 파리에서 유학할 때 프랑스를 찾은 고(故) 김 전 총장을 통역하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김 전 총장은 한국에 연구중심대학을 만들어 국부를 살찌울 인재양성을 목표로 하는 대학을 만들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유럽의 여러 대학들을 다니며 벤치마킹하고 있었는데 마침 파리 콩피에뉴공과대학에 유학 중이던 이 대표에게 통역 부탁이 들어왔다. 이 일로 이 대표는 김 전 총장의 눈에 들어 포항공대 창립 멤버가 됐다. 김 전 총장은 이 대표를 당시 포항공대 1호 교수로 초빙했다. 이 대표는 "당시 파리 유학 후 오라는 데는 여러 곳이 있었다"며 "그러나 1호 교수가 돼 능력 있는 여러 분들과 한뜻으로 새로운 대학을 설계해보고 싶어 과감하게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포스텍 설립 이사장이었던 박 전 회장과 대학 마스터플랜을 놓고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쌓은 관계가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졌다. 이 대표의 능력을 눈여겨보던 박 전 회장은 1997년 포스텍기술투자 대표로 발탁했고 2002년에는 포스코 신사업본부를 담당하도록 배려했다. 이 대표는 "김 전 총장과 박 전 회장은 대학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떻게 인재를 키워 국가에 보답할까를 고민하면서 최종적으로는 늘 사적이지 않고 공적인 관점에서 판단을 내렸는데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인상 깊은 장면"이라며 "사회에 나와 2명의 큰 멘토를 모신 게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파리 유학 이후 15년은 교수로, 또 다른 15년은 벤처캐피털(포스텍기술투자)과 기업(포스코)에서 각각 지냈다. 교수가 되기도 힘든데 벤처캐피털 사장과 대기업 임원까지 두루 걸친 이 대표는 "지금까지 인생 3막을 살았다"고 웃었다.
그는 지난 2012년 공적영역인 서울산업진흥원(SBA)으로 옮겨오면서 인생 4막을 시작했다. SBA는 서울시 산하 기관으로 중소기업 지원이 주요 목적이다. 예비창업자를 위한 창업교육부터 사업화 지원, 청장년 기업가 양성 프로그램, 벤처기업을 위한 창업보육에서 성장기업 마케팅까지 기업성장의 전주기 인프라와 지원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다.
SBA를 선택하게 된 것은 박원순 시장과의 인연 때문으로 알려졌다. 박 시장이 '아름다운 가게' 전국 대표를 지내던 시절 이 대표에게 강연요청이 왔고 몇 번 강연해준 것을 인연으로 알고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박 시장이 서울의 미래먹거리를 책임질 적임자를 물색하던 중 이 대표를 발탁했다는 후문이다.
사진=권욱기자
대담=오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