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CEO&Story] 김덕술 삼해상사 대표

김 하나에 모든 역량·투자 집중

덕분에 남들보다 빨리 시장 공략

술술 풀리면서 '김의 종가' 됐죠



삼협회 회원들이 이집트 여행 중 피라미드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부친, 선입금 등 통해 신뢰 구축… '조미김' 개발한 원조

代 이어 말단직원부터 시작 '명가김' 앞세워 제2 도약


국내 김 수출량 절반 차지 … 7월부터 미국 현지생산 가능

'준비된 둘째 딸' 3대 승계도 시동 '100년 기업' 부푼 꿈


식탁에 자주 오르는 '김'이라는 단일 품목 하나로 연간 매출액의 절반이 넘는 3,000만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100년 기업'을 내다보면서 2대를 넘어 3대 경영을 준비하는 기업이 있다. 김 산업의 부흥을 내걸고 지난 1968년 설립된 삼해상사는 위탁판매업을 시작으로 도매업과 제조업, 물류와 수출로 진화를 거듭하며 '김의 종가'로 자리 잡고 있다.

19일 서울 가락동 삼해상사 본사에서 만난 김덕술(52·사진) 대표는 "남들은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여러 품목에 힘을 분산할 때 저희는 김 하나만 바라보면서 모든 역량을 집중했고 김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면서 "한 품목에 힘을 집중하면 타이밍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만큼 삼해상사는 남들보다 반걸음 빨랐고 그 덕분에 실패도 줄일 수 있었다"며 성공비결을 소개했다.

삼해상사가 한 해에 취급하는 김은 8억5,000만장에 달하는데 이는 여의도 면적의 4배에 이른다. 이를 한 줄로 길게 세우면 지구를 4바퀴 반이나 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5,022만명)이 1인당 17장씩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삼해상사의 연간 매출(2014년 기준 688억원) 가운데 해외 수출이 3,500만달러로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국내 식품 가운데서 단일 품목으로 김이 한 해 7,600만달러 정도 수출되는 사실을 고려하면 한국 김 수출량의 절반 가까이를 삼해상사가 담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김과 맺은 인연, 신뢰로 키우다=김 대표의 부친이자 삼해상사의 창업주인 김광중(80) 회장은 원래 법학도였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조부의 말에 떠밀려 당시 농수산물 전문 무역업체인 삼덕물산에 들어갔다. 10년간 무역업을 하면서 물건의 흐름에 눈이 뜨인 김 회장은 자신의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68년 12월10일 남대문에서 위탁상으로 창업했다. 바로 삼해상사다. 당시 거래가 활발했던 오징어나 미역·김 등 건어물을 주로 거래했던 삼해상사는 다른 상점과 차별화된 거래방식으로 생산 어민의 마음을 사며 규모를 키울 수 있었다. 김 대표는 "지방에서 어민들이 올라와 물건을 납품하면 일반적으로 판매가 끝난 후에야 대금을 치르는데 부친은 아침에 물건을 받고 난 후에는 (현금 거래가 많은) 극장에서 돈을 빌려 어민들에게 먼저 물건 값을 치렀다"며 "후발주자이지만 이처럼 선입금을 하니 다른 생산 어민들도 우리에게 물건을 대려고 했고 그러다 보니 좋은 물건을 먼저 고를 수 있게 되면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정도(正道) 경영'을 몸소 실천하면서 신뢰를 쌓아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75년 일본에서 반송된 김 단독 입찰 사건이다. 당시 삼성과 효성 등 국내 12개 상사가 연합해 일본에 김을 공급했는데 자체적으로 저장기술을 확보하게 된 일본 측에서 1974년 납품 받은 김 전량을 그 이듬해에 돌려보내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그 양만도 68만톳(1톳당 100장)에 달했다. 김 대표는 "한꺼번에 많은 물량이 국내에 쏟아지면 유통질서가 무너지면서 결국 생산 어민들이 피해를 볼 것이라고 우려했던 부친은 우리가 직접 그 부담을 안자고 결단했다"면서 "햇김 출하시기인 11월을 피해 9월에 1차로 팔고 그 이듬해 봄 김 공급이 달리는 시기에 또 2차로 김을 출하하면서 삼해상사는 금전적 피해도 줄일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김군으로 시작해 김 사장이 되기까지=1980년대 초반까지 김 도매업을 하던 삼해상사는 1981년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결정되자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고민하게 된다. 김 회장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조미 김 사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원래는 일본에서 유행하는 간장 베이스의 조미 김을 만들기로 하고 김 조미 기계까지 들여왔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김 대표는 "달게 먹는 일본의 식습관이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달랐던 거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고유 방식대로 소금과 기름양념을 한 조미 김을 내놓기로 한 겁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1985년 익산공장을 준공하고 생산라인을 7개로 증설했지만 넘치는 수요에 24시간 3교대를 돌리면서 사업은 번창했다. 삼해김이 우리의 김 문화를 바꾼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조미 김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자 동원과 해표 등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왔고 이들의 거센 공습을 버티지 못한 삼해김은 결국 사조산업이 인수하면서 이름도 '사조김'으로 바뀌게 됐다.

주력 아이템을 포기하면서 삼해상사의 매출은 전년의 3분의1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이렇듯 어려운 시기에 김 대표는 회사에 합류하게 된다. 당초 남의 돈으로 대규모 사업을 벌이는 대기업 상사에 들어가고 싶었던 김 대표는 "100년 기업을 일구려면 네가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부친의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말단직원으로 회사에 들어왔다.

"1987년 9월12일 제대했는데 25일 곧바로 결혼식을 치렀어요. 군 복무 중에 선을 봤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된 거지요"

10월 초 연휴기간에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10월10일 새벽5시 가락동 도매시장으로 첫 출근을 했다. 대표이사 아들이라는 특권 대신 김군으로 불렸던 말단직원부터 시작해 수출과장과 기획실장·이사·전무를 거치며 2005년 대표이사 자리에 오를 때까지 철저하게 후계자 수업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굳은 결심으로 국내외 영업 등 삼해상사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존재감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화점 식품매장 바이어들이 삼해상사 측에 다시 조미 김 사업을 시작하라고 권유하면서 터닝포인트를 맞이한다. 대기업들만 있으니 조미 김 제품 가격이 계속 올라 장사하기 힘들다는 게 그 이유였다. 1990년 부안공장을 착공해 그 이듬해부터 '명가김'이라는 브랜드로 조미 김 사업은 다시 빛을 보게 됐다.

1988년에는 삼해상사의 기술로 '즉석 조미 김 미니 구이 기계'를 개발하기도 했다. 특허를 내서 독점하면 수익을 높일 수 있지만 오히려 여러 기계회사에 발주해 누구나 이용할 수 있게 배려했다. 이후 지금까지 수만대가 만들어졌고 세계 시장에도 공급돼 한국의 김맛을 전수하고 수출하는 데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세계로 뻗는 한국 김, 그 한가운데 삼해상사가 있다=삼해상사의 내수시장 점유율은 2007년 18%까지 높아졌지만 지난해에는 15%로 줄었다. 대신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이 수출에서 발생한다. 2011년 2,000만불 수출탑을 받았던 삼해상사는 올해는 3,000만불 수출탑을 거머쥘 것으로 전망된다. 주요 수출국은 태국과 일본·미국·대만 등 15개국이다.

우리 김이 이렇듯 세계 시장에서 호평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사람이 먹는 식자재인 마늘과 고춧가루 등은 세계 20개국 이상에서 생산됩니다. 하지만 김은 우리나라와 일본·중국에서만 생산되지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 김 생산량의 55%가 나옵니다. 더군다나 우리 김은 돌김도 있고 파래김도 있고 두께도 여러 가지라 다양하다는 측면에서 다른 나라에 비해 경쟁력이 있어요. 일본은 생산성 위주로 김 산업이 발전되다 보니 스시용 김으로만 획일화돼 있는 게 단점이지요. 우리 김이 갖고 있는 특유의 식감을 잘 발전시키면 글로벌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도 열심이다. 해양수산부의 유기식품 인증과 미국의 안전 먹거리 인증마크인 USDA, 수산물이력제 시행, HACCP(위생관리체계), KSA(코셔마크로 유대인의 율법에 따라 처리 가공된 식품에 주는 인증), HALAL(이슬람 율법에 따라 가공·처리된 식품에 부여하는 인증) 등을 이미 확보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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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올해는 최근 몇 년간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미국 시장을 적극 공략할 방침이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프리미엄 라인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확보했고 오는 7월부터는 현지 생산이 가능하다고 본다"면서 "내후년부터는 동부에도 생산라인을 증설해 미국 전역에서 '명가김'을 맛볼 수 있게 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100년 기업을 꿈꾸는 삼해상사는 2대 김 대표에 이어 3대 승계작업에도 시동을 걸고 있다.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인 둘째 딸 수정양이 어릴 적부터 가업을 이어받겠다는 의지를 밝혀 그에 맞춰 캐나다 유학을 다녀오고 지금은 제주도 국제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한다.

김 대표는 "창업은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가업승계는 특별한 재능보다는 준비된 사람이 하는 것"이라며 "수정이는 중2 때부터 '글로벌 삼해상사'를 비전으로 갖고 자진해서 유학을 다녀왔고 지금까지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서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나의 회사는 거기에 속한 구성원들의 소중한 일터이기 때문에 (경영자는) 더욱 잘 지켜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업(業)을 이어야 하고 그렇듯 착실히 준비해온 사람이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덕술 대표는

△1963년 서울

△1981년 경신고

△1985년 한국외대 일본어과

△1987년 10월 삼해상사 입사

△1994년 영업이사

△2000년 삼해상사 전무

△2005년 삼해상사 대표이사

△2009년 한국김산업연합회 회장



납품업체와 매년 해외여행… 장애인 고용지원에도 앞장

●명가김 성공비결은 '공생'

김덕술 대표는 '명가김'의 성공비결로 '공생'을 꼽았다. 협력사들과의 돈독한 유대관계는 이 회사의 자랑거리다. '상생과 나눔'은 백년기업을 꿈꾸며 달려온 명가김이 회사 설립 이후 꾸준히 지켜온 가치다.

이 같은 공생관계의 중심에는 '삼협회(삼해상사와 협력하는 모임)'가 있다. 가공 김의 원재료인 물김을 건조해 납품하는 공장 협력사와 함께 친목을 도모하자는 취지에서 지난 1990년 5월 삼협회가 탄생했다. 회원 수 11명의 삼협회는 물김의 상태와 완성된 김의 맛 등 상품정보를 공유하며 매년 가을에 회의를 하고 김 재배 시기가 끝나는 늦봄에는 여러 나라의 시장을 둘러보기 위해 해외여행을 떠난다.

30년 넘게 물김을 납품하고 있는 삼협회 회원 이경춘(71)씨는 "단순히 원재료만 납품하는 협력체가 아닌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인 셈"이라면서 "내 아들이 가업을 이을 텐데 계속 (명가김과) 거래하도록 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2011년부터는 나눔의 가치도 실천하고 있다. 생산공장이 자리한 부안 지역에 지체장애인들을 고용하는 '바다의 향기' 사업장을 지원해왔다. 부지에 공장을 세우고 김 구이 기계 1대를 대여해줬으며 본사 직원 10명을 바다의 향기로 보내 기술을 전수했다. 지난해에는 일자리창출지원 유공단체로 선정돼 고용노동부장관표창을 받기도 했다.



사진=권욱기자


정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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