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위기의 건자재 대리점, 느는 건 한숨뿐

부동산 침체에 시장 수요 줄어<br>무담보 계약·저가 입찰 경쟁 등 위험 부담 안은채 무리한 납품<br>건설사 부도땐 대금 지급 후순위… 대금 떼여 폐업하는 사례 속출


#1 서울 성북구에서 수전, 도기 등 욕실용 건자재 대리점을 운영중인 A사장은 납품대금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아파트 건설사와 물품 공급 계약을 맺었다.

A사장이 계약한 건설사는 위험군으로 지목되는 중견 업체로 자금난이 더 심해지면 부도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 부도가 나면 노동자 인건비, 금융권 등이 먼저 대금을 받고 건자재업체는 가장 후순위로 A사장은 사실상 한 푼도 건질 수 없게 된다. A사장은 "납품 대금을 못 받을 경우를 대비한 담보나 보증금도 없어 건설사 부도 땐 같이 길거리에 나 앉는 수 밖에 없다"면서도 "하지만 계약을 놓치면 실적이 없어 다음 계약도 힘들어 어쩔 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2 섀시, 도어 손잡이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동대문구의 한 건자재 대리점은 저가 입찰로 손해 볼게 뻔한 데도 인근 빌딩 공사에 참여했다. 입찰에서 같은 브랜드의 동일한 제품을 놓고 인근 대리점과 경쟁이 붙은 것. 다른 회사 제품과 경쟁하면 제품의 장점, 기술력을 더 알려 차별화시키겠지만, 동일한 제품이다 보니 입찰에 성공하려면 무조건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해야 한다.

문제는 입찰을 따내도 납품할수록 손해는 점점 더 커진다는 것. 대리점 B사장은 "건설사 하나를 놓고 여러 대리점들이 입찰을 따내려 하다 보니 저가 입찰이 불가피하다"며 "손해를 보더라도 거래처를 잡아놔야 살아남지, 일거리가 없어 문을 닫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건설사나 건축업자를 고객으로 하는 건자재 대리점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시장 수요가 줄어들면서 어떻게든 일거리를 따내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저가로 입찰 경쟁에 뛰어들거나, 건설사 부도 땐 납품 대금도 받지 못하고 문을 닫는 일이 빈번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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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업계에 따르면 한 욕실자재 전문업체의 경우 자사 메이저 대리점 중 폐업한 곳이 3년새 70%에 달할 정도다. 이들 대리점들은 건설사와 납품 계약 때 대금을 못 받을 경우를 대비해 원칙적으로 건설사로부터 담보를 제공받아야 하지만 무담보로 계약을 체결한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해당 건설사가 워크아웃되자 대리점들은 돈을 받지 못했고 경영난을 견디다 못해 문을 닫게 됐다.

건설사들은 자신들과 억지로 계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일거리가 아쉬운 대리점들이 을의 입장에서 계약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통상 납품 계약시에는 담보를 설정하는 게 원칙으로 대리점과 달리 규모가 큰 본사가 직접 건설사와 계약을 할 때에는 담보를 제공받고 있다.

건설사 법정관리나 부도시 대금 지급 순서에서 건자재업체가 가장 후순위로 돼있는 것도 문제다. 가장 먼저 건설 노동자 인건비가 지급되고 시공비 등을 정산한 후 마지막에 건축자재 대금을 지급한다. 실제 부도난 업체가 공사에 들어간 모든 돈을 지급할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고, 이러다 보니 가장 후순위인 건자재 대리점들은 돈을 못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대리점들의 피해가 늘어남에 따라 본사가 직접 입찰가격 조정이나 사전 상담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대리점은 개인 사업체이고 스스로 계약을 하는 등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 본사가 주도적으로 나서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건자재 업체 관계자는 "대형 건설사의 경우에는 본사가 직접 계약을 통해 담보를 제공받아 안전하게 영업하는 경우가 많지만 보통 대리점들은 무담보로 건설사들과 직접 납품계약을 한다"며 "본사에서는 대리점이 입찰 참여할 때 가격 등 조정을 해주지만 원칙적으로 본사는 물건만 공급하고 대부분은 대리점들이 자율적으로 영업을 하는 시스템이다"고 말했다.

업계는 대리점들의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당분간 더 지속될 뿐만 아니라 건설사들의 경영 사정도 나빠질게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업계는 내후년쯤에야 국내 부동산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작년 풍림산업, STX건설 등이 워크아웃 됐을 때 문닫는 대리점들이 한두곳이 아니었다"며 "납품대금으로 받은 어음이 부도 후에 결제가 안돼는 등 돈을 못 받아 대리점들이 빚까지 지고 있지만 본사로서도 이를 해결할 뾰족한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최용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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