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국세청도 기업도 몸사리기… 재계 "소통채널 없어 난감"

'100대 기업 접촉금지령' 2개월… 국세청은 지금<br>기업인 "투자 도움되는 세무정책 방향 묻지도 못해요"<br>"차한잔 하면서 자문구하는 정책카페·간담회 생겼으면…"

# 국세청의 한 국장은 얼마 전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어 식당에 들어갔다가 수상한 인기척을 느꼈다.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는 얼굴은 없었다. 업무와 무관한 만남이어서 비서에게 말하지 않고 나온 터라 더욱 의아했다. 알고 보니 국세청의 세무조사 감찰 태스크포스(TF) 팀원이 국세청 100대 기업 접촉 금지령을 지키는지 암행감찰을 하고 있었다.

# 수도권에서 25년째 기업체를 운영해온 박모(가명)씨는 오래 알고 지낸 세무서장과 어색한 상황을 연출했다. 평소처럼 주말에 골프장을 예약해놓았다고 했더니 서장이 정색을 하고 거절한 것이다. 100대 기업 접촉 금지령은 일선 세무서장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박씨는 "우리 회사는 대기업이 아닌데도 몸 사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지난 8월29일 김덕중 국세청장이 '100대 기업 접촉 금지령'을 내린 지 2개월여가 흐른 지금 국세청 안팎의 세태가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국세청의 3급 이상 국장과 일선 세무서장(4급) 등 고위간부는 구설에 오를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국세청 고위임원과 접촉해 세무정보를 얻으려는 재계 관계자들은 소통의 통로가 줄었다는 민원(?)을 토로한다.

가뜩이나 소원한 국세청과 기업인 간의 소통 채널은 사실상 단절됐다.

◇공식 동창회는 되지만 소규모 동문회는 금지=12일 국세청과 업계에 따르면 국세청은 청내 3급 이상 및 일선 세무서 4급은 매출액 100위 이내 기업 관계자와 사적으로 만나지 말라는 쇄신방안을 청내에 전달했다. 해당 기업은 물론 지주회사의 전무ㆍ상무 등 임원과 고문 및 세무대리인이 접촉금지 대상이다. 국세청 세무조사 TF 관계자는 "점심이나 저녁 약속은 물론 골프 접대나 선물을 받는 행위가 모두 금지된다"면서 "의사소통이 필요한 경우 전화를 이용하거나 청내 사무실에서 업무시간에 만나면 된다"고 말했다.

통상적으로 공무원 행동강령 시행규칙에는 음식물이나 선물ㆍ편의의 기준을 3만원으로 돼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예전에는 국세청도 공무원 행동강령을 따랐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100대 기업 접촉 금지령은 CJ그룹 세무조사 무마 의혹으로 전군표 전 청장과 허병익 전 차장이 구속되고 송광조 전 서울지방국세청장마저 부적절한 골프 접대 등을 받아 사퇴한 일이 계기가 됐다. 당시 검찰 압수수색에서는 해당 기업이 쓴 접대비 영수증이 드러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청장이 8월29일 전국 세무관서장 회의에서 "공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사사로운 손님을 물리칠 줄 아는 병객(屛客)을 실천해야 한다"며 "이 시간 이후 대기업 관계자와 사적으로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어 국세청 국장 이상 고위간부들은 100대 기업 관계자와 사적 접촉을 하지 않겠다는 자체 쇄신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5월 출범한 세무조사 감찰 TF에서 내부단속을 담당한다. 젊은 TF 실무직원이 고위간부가 알아보지 못하는 점을 활용해 100대 기업 관계자를 만나는지 몰래 따라가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예외도 있다. 동창회나 결혼식ㆍ장례식 등에서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은 허용된다. 국세청 고위임원이 재계 관계자에게 자녀 등의 결혼식 청첩장을 직접 전달하는 것은 금지돼 있지만 조세 관련 전문지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까지 막지는 않는다. 다만 공식적인 동창회가 아니라 소규모로 만나는 동문모임은 금지된다. 세무조사 감찰TF 관계자는 "청장도 이후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면서 "고위간부 스스로 정한 쇄신방안인 만큼 아직까지 어긴 간부는 없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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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약속도 잡지 말라는 지침이어서 골프 모임은 더더욱 어렵다. 관가에서는 박근혜 정부 초반 청와대에서 골프 금지령을 내린 후 여름휴가부터는 자비로 골프를 하는 것은 허용한다는 지침이 내려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 청장은 100대 기업 접촉 금지를 강조하면서 골프도 금지했다. 한 관계자는 "공무원 월급이 뻔한데 자비로 골프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면서 "정 하고 싶으면 사표를 쓰고 하면 된다"고 말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관계자는 "국세청 인사철이 다가오면서 고위간부들은 더더욱 신변관리에 예민해졌다"면서 "처음에는 다들 선언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내부에서 느끼는 압박은 그 이상"이라고 귀띔했다.

◇재계, 접촉통로 없다며 난감=재계는 난감해하고 있다. 뇌물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세청 세무행정을 파악하는 자리가 줄었기 때문이다. 한 10대 그룹 대관업무 담당자는 "100대 기업 접촉 금지령이 내려진 후 공시자료에서 우리 회사가 어디에 해당하는지 알아봤다"면서 "100대 기업에는 해당하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기업과 국세청 간 사적인 만남을 꺼리는 분위기여서 8월 이후 점심 약속도 잡지 못했다"고 말했다.

재계 대관업무 담당자 사이에는 일종의 소모임이 있어 국세청 과장급과 만나 구체적인 세무사례나 정책방향을 듣기도 한다. 한 관계자는 "공식 문서에는 나오지 않는 정책의 흐름이나 강조점을 파악하면 투자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서 "요즘은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야 하는데 관공서에 가서 바쁜 공무원을 붙잡고 질문하기가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세무업계에서는 경쟁기업이 국세청 직원과 사적인 자리에서 상대방의 탈루 의혹을 국세청에 제보하는 일도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한 세무업계 관계자는 "국세청 세원정보과 실무진은 서류상에 나타나지 않는 탈루 의혹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여러 통로로 접촉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자연스럽게 차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국세행정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정책카페나 간담회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세청 직원은 기업인과 만나는 일을 꺼린다고 말했다. 한 국세청 고위간부는 "지침을 어기고 몰래 기업인을 만나려 해도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볼까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과장ㆍ계장과 점심을 먹거나 저녁에는 국세청 국장끼리 회식을 하곤 한다"고 전했다.

국세청 세무조사 감찰 TF 관계자는 "꼭 국세청 고위관료를 만나야 중요한 정보를 듣는 게 아니다"라며 "재계 입장에서도 불필요한 만남을 꺼리는 명분이 생기니 좋지 않겠냐"고 강조했다.

임세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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