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월 28일] <1606> 카노사의 굴욕


살을 에는 한파에도 맨발에 남루한 수도복만 걸친 27세의 젊은이가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는 누구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였다. 황제가 자비를 구걸하게 된 이유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당시 57세)의 파문(破門). 사제서품권을 행사한다며 교황에게 맞섰던 젊은 황제는 종교적 공민권 박탈은 물론 자신을 향한 반역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파문령이 내려지고 일부 귀족들이 반란을 획책하자 부랴부랴 교황을 찾았다. 참회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던 교황은 황제가 용서를 청한 지 사흘 만인 1077년 1월28일에야 카노사 성문을 열었다. 황제는 겨우 죄를 사면 받았다. 교권(종교)이 속권(황제ㆍ국왕)보다 우월해진 결정적 계기인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이렇게 일어났다. 사건은 굴욕으로 끝났을까. 그렇지 않다. 하인리히 4세는 절치부심하며 6년 동안 세력을 키운 뒤 로마로 진군해 그레고리우스 7세를 끌어내리고 자기 입맛에 맞는 새 교황을 앉혔다. 하인리히 4세가 복수에 성공했어도 유럽 국왕 서열 1위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교황에게 굴종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아 교황의 힘이 세속군주의 힘을 누르는 시대가 열렸다. 카노사의 굴욕은 자본의 지도까지 바꿨다. 정치와 종교로 묶여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떨어지며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공화국들이 적극적인 무역정책으로 자본을 쌓았다. 십자군 전쟁으로 더욱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에서 문예부흥운동(르네상스)이 일어나고 근대를 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독일에서도 황제의 권한이 약해지며 북부 도시국가들을 중심으로 한자도시동맹이 형성돼 청어잡이를 근간으로 경제권을 형성해나갔다. 대항해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유럽을 양분했던 양대 경제권이 카노사의 굴욕을 시발로 갈려나갔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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