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스포츠 문화

[책] 국가와 민족을 위해 총을 든 사나이

■ 신채호 다시 읽기(이호룡 지음, 돌베개 펴냄)<br>민족주의자로 한정짓는건 잘못된 이해<br>끊임없이 새로운 사상 수용·발전<br>테러 주도한 아나키스트 모습 재조명


신채호가 수감생활 했던 뤼순감옥

"한 국민이 되어 이 세계에 생존을 구하려 할진대, 없는 시비를 가리지 말고, 오직 이해를 위해 활동할 뿐이다. 칼을 가지고 살육을 부름이 우리에게 이(利)하거든 이대로 하며, … 폭동·암살로 선봉을 삼아 적의 치안을 흔듦이 이(利)하거든 폭동·암살로 일하며, … 무엇에 주저하며 무엇에 무서워하리오."

대표적인 민족주의자 단재 신채호가 아나키즘에 입각해 국가를 위한 테러·암살을 정당화한 '이해론(利害論)'의 한 대목이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1936년 57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도 이어졌다. 외국환 위조사건(1928년)으로 선 법정에서도 '양심에 부끄러움이나 거리낌이 없소'라고 당당했을 정도다.


한국의 아나키즘 연구에 천착해온 사학자 이호룡이 민족주의자 신채호의 아나키스트 측면을 재조명했다. 한국의 아나키즘에 관한 책을 여러 권 낸 저자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잘못 이해되고 평가된 인물이 단재 신채호라고 강조한다. 단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사상을 수용·발전시키며 봉건 유학자에서 자강운동가, 민족주의자, 아나키스트로 전환했다. 오로지 '민족주의자'로만 굳어진 단재 이미지는 1960~1970년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 이에 저항하던 민주화운동세력이 모두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만들어진 부분이 크다는 얘기다.

신채호는 아홉 살에 자치통감을 읽고, 열두세 살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할 정도로 '신동'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열다섯 되던 해 갑오농민전쟁을 목격하고 조선 봉건왕조에 실망하면서, 사회진화론과 실력양성운동을 수용하게 된다. 스물여섯 살에는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 주필, 1907년에는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며 개화운동과 자강운동에 앞장선다.


갈수록 일제 침탈이 노골화되면서 1910년대에 민족주의 역사학과 민족해방운동에 눈을 돌리지만, 러시아혁명을 보며 한계를 깨닫고 사회주의에 관심 갖는다. 본격적인 아나키스트로의 전환은 1919년 3·1운동 즈음, 1921년에는 의열단과 함께 당시 테러활동을 주도한 흑색청년동맹을 설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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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은 때로 민중들을 각성시키기도 했지만, 또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애꿎은 민간인, 특히 외국인이 다치는 경우까지 생기며 여론은 더 악화됐다. 이에 의열단은 단재에게 테러를 민족해방운동의 방법으로 이론화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 결과물인 '조선혁명선언'(1923년)은 아나키스트로서의 그를 알리게 된다.

심지어 1925년에는 신문 지면을 통해 대표적인 아나키즘 이론가 크로포트킨을 석가·공자·예수·마르크스와 더불어 5대 사상가로 끌어올렸다. "아아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하노라'란 논문의 세계를 받자! 이 글이 가장 병에 맞는 약방이 될까 한다"고 호소할 만큼 아나키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단재의 정부관이다. 민족을 우선했던 그에게 정부란 민중을 수탈하는 기구였을 뿐이다. 1928년 텐진에서 열린 한국인 아나키스트대회 선언에서도 신채호는 정부를 '지배계급이 무산민중으로부터 약탈한 소득을 분배하려는, 곧 인육분장소(人肉分臟所)'로 묘사하며, 정부를 파괴해야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일제로부터 구하려는 것은 민족이요 국가지, 기존 왕실이나 지배계급은 아니라고 못 박은 것이다. 그렇게 건설하려 한 것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아나코-코뮤니스트' 사회였다. 1만8,000원.

이재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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