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IMF

1997년 12월20일 오후 5시 서울 힐튼호텔. 19층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초로의 신사가 걸어 나왔다. ‘박영철 금융연구원장이다!’ 숨어서 기다리던 서울경제신문 정경부 김영기ㆍ신경립 기자는 전율한다. ‘맞구나. 결국 IMF로 가는구나.’ 정부의 위임을 받은 박영철 원장(고려대 교수)을 맞은 사람은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 구제금융 조건을 협의하기 위해 극비 방한한 참이다. 1911호 객실의 비밀 협상은 고성으로 시작됐다. 10분쯤 흐른 뒤 밖에서 귀를 기울이던 신 기자의 귀에 ‘We need at most sixty billion dollars.(최대 600억 달러가 필요하다)’는 박 원장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possible(가능하다)’이란 대답도 연속적으로 흘러 나왔다. 구제금융 요청과 지원이 확인된 순간이다. 다음 날 아침 특종 기사와 사진이 실렸다. ‘우리경제의 펀더멘털(기초)이 튼튼하다’고 되풀이하던 정부는 더 이상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고 판단, 기사가 나간 날 저녁 IMF에 대한 지원 요청을 공식 발표한다. 임명장을 받은 지 이틀 만에 IMF행을 알리는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협상팀 실무책임자의 회고. “빨리 결정해야 혼란과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건의했지만 청와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 앞섰던 것 같다. 극비 협상의 활자화는 정부의 정책결단을 앞당겼다”. 우연인지 11월20일은 을사늑약(1905년)에 분개한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ㆍ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를 남긴 날이다. 그 겨울은 추웠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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