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15일] 칼 피셔


[오늘의 경제소사/7월15일] 칼 피셔 권홍우 편집위원 ‘신문 504개면.’ 역사상 최다 발행면수다. 기록의 주인공은 ‘마이애미 데일리 뉴스’. 83년 전인 1925년의 어느 여름날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어지간한 책보다도 두꺼운 신문에 도대체 뭘 담았을까. 부동산 광고다. 호황을 구가하던 1920년대 미국에서도 부동산 개발로 흥청거리던 마이애미 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허다하게 일어났다. 15만달러에 매각된 상업지역이 얼마 뒤 400만달러에 팔린 적도 있다. 개발 열풍의 주역은 칼 피셔(Carl Graham Fisher). 1874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독한 난시로 12세에 학업을 접고 잡화점과 서점, 신문 가판대, 담배와 설탕 행상까지 등 닥치는 대로 일하던 그가 성공의 계기를 잡은 것은 자전거 사업. 17세에 자전거포를 차려 돈을 모은 후 20세에 자동차 램프의 특허를 사들이며 부품 사업에 진출한 그는 전조등을 독점 공급하며 부를 쌓았다. 판매업에도 진출해 ‘최초의 자동차 딜러’라는 기록까지 갖고 있다. 거부가 된 그는 도로 사업에 눈을 돌렸다. 도로 포장률이 8.66%에 불과하던 시절, 그는 1913년 미국 최초의 동서 횡단도로인 연장 5,454㎞짜리 포장도로 ‘링컨 도로’를 건설해 명성을 얻었다. 남북 종단도로인 ‘딕시 도로’를 뚫을 때에는 플로리다 개발을 주도해 마이애미 부동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최고 갑부로 명성을 얻을 즈음인 1926년 마이애미를 강타한 태풍에 타격 받은 그는 1929년 주가 대폭락에서 전재산을 날리고 1939년 7월15일 사망할 때까지 재기하지 못했으나 아직도 고속도로의 아버지로 기억된다. 부동산 거품은 진작에 사라졌어도 그의 이름은 영원히 살아 있다. 생전에 건설한 도로며 도시 인프라가 존속하는 한.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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