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리빙 앤 조이] 텃새들의 텃세 때문에… 철새들은 마냥 서럽다

■ 경력사원, 그들만의 애환<br>이직자 73%가 배타적 대우 경험… 적응 걸림돌로<br>쌓은 인맥·노하우 바탕 실력과 친화력으로 극복을


10~20년 전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이직(移職)은 특이하거나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 한 직장에서만 일하다 퇴직하는 것은 미덕에 속했고 20년ㆍ30년 근속을 기념하는 아름다운 풍경도 있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평생직장' 신화가 무너졌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직장생활에서 회사가 내치기 전에 내가 먼저 좋은 조건을 찾아 회사를 떠나겠다는 이직 열풍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오히려 좀더 나은 근무환경과 임금, 비전 등을 보고 직장을 옮기는 사람들에 대해 '나름대로 능력 있다'며 인정하는 분위기까지 정착되고 있다. 세계 금융 위기까지 덮쳐 일자리 불안이 또 다시 심화되면서 '자의든 타의든' 직장을 옮기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얼마 전 온라인 취업 사이트 '사람인'이 중소기업 인사담당자 233명을 대상으로 '2008년 이직률 현황'에 대해 설문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평균 이직률은 11.7%이었으며 이직이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 분야는 '제조 및 생산'(21.5%)과 '영업'(18%)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회사를 옮긴 직장인들은 과연 새 직장에서 잘 적응하고 있을까. 경력직 사원들이 새 일터에서 낯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겪게 되는 애환을 담아봤다. ■기존 직원들 텃세에 상처받는 경력직원 전 직장과 전혀 다른 기업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기는 그리 녹록지 않다. 회사를 옮긴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적응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얼마 전 이직 경험이 있는 직장인 983명을 대상으로 이직 후 기업 문화에 대한 적응 여부를 조사한 결과 '입사 후 바로 적응됐다'는 응답은 5.7%에 불과하고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6.9%가 '1개월에서 3개월 정도' 걸린다고 답했다. 특히 경력 사원들이 새 기업 문화에 적응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기존 직원들이 경력 직원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이른바 '텃세'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인크루트 조사에서 이직 경험이 있는 직장인 응답자 중 73.1%가 텃세를 경험한 적이 있다는 것. 그런데 경력사원을 채용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경력사원이 조직에 쉽게 적응할 수 있고 실전에 바로 투입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채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력 사원들은 기존 직원들의 텃세를 배짱 좋게 이겨내고 빠른 시간 내에 회사가 원하는 적응력과 실무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지며 고민하게 된다. 디자인 업체에서 근무하는 이성미(32) 씨는 "새로 옮긴 회사의 동료들끼리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다"며 "원래 사교적인 성격이라 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실 때 대화에 끼어 들려고 하지만 대부분 내가 모르는 주제로 대화가 오고 가 머쓱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고 토로했다. 그는 "겉으로는 챙겨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조직 밖의 사람으로 취급해 '왕따 아닌 왕따'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올초 중견 업체에서 대기업 홍보팀으로 옮긴 신여진(31) 씨는 "누가 봐도 비효율적이고 쓸모 없는 업무 프로세스들이 분명한데 '원래 우리는 쭉 이렇게 해왔어요'라는 말을 앞세우며 변화를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 직원들의 완고한 모습에 답답할 때가 많다"면서도 "내가 대기업 출신도 아닌데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자'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벙어리 냉가슴만 앓는다"며 한숨지었다. 지난 6월 IT 업체에서 자동차 업체의 마케팅 기획으로 이직한 김영석(34) 씨는 업무 인수 인계가 이뤄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 바뀌면 관련 자료 등을 확실하게 넘겨줘야 합당한데 상사와 동료들 모두 경력직이니 알아서 잘 해보라는 말만 한다"며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자는 식 아니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전 직장에서의 경력을 모두 인정받고 회사를 옮기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작은 조직에서 큰 조직으로 옮길 경우 연차가 깎이면서 기존 직원의 텃세를 실감하게 된다. 작은 게임회사에서 올초 대기업 기획팀으로 이직한 이수석(32) 씨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상황이지만 말 못할 고민이 있다. 자신보다 3살이나 어린 여자 선배를 사수로 만나 사사건건 간섭을 받는 것은 물론 반말로 업무 지시를 받을 때가 잦기 때문. 더욱이 여자 선배가 자신은 공채 출신이고 이 씨는 경력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투로 말할 때는 자존심이 상한다. 몇 년 전 경제신문에서 방송국 경력기자로 이직한 민석우(41) 씨 역시 경력이 3년 정도 깎이면서 어린 선배들을 깎듯이 모셔야 하는 처지가 됐다. 특히 전 직장에서 같은 출입처를 나갔던 동기가 새 직장에서는 3기수 높은 선배가 되다 보니 어색해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민 씨는 "이직 후 연봉도 높아지고 사회적인 대우도 좋아졌지만 분명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경제 위기로 직장 옮길수록 깎이는 연봉 경기가 좋을 때는 직장을 옮기면 연봉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글로벌 경제 위기 후 근무하던 직원까지 내보내고 직원 채용 자체를 꺼리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선 연봉이 깎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인천 남동공단의 가구 업체에서 영업부장으로 근무하던 김석(42) 씨는 최근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서 인근의 핸드폰 부품업체로 옮겼다. 영업 경험을 인정받아 이직에 성공하긴 했지만 새로 옮긴 회사에서 그는 영업팀 과장으로 직급이 낮아졌으며 연봉도 500만원 정도 적게 책정됐다. 김 씨는 "당장 구직 자체가 급해 모든 걸 감수하겠다고 각오했지만 애들 학비며 생활비는 오르는 현실에서 속이 상한다"고 푸념했다. 5년간 인터넷 포털 업체에서 일하다 직장 상사와의 마찰로 인터넷 쇼핑몰 업체로 옮긴 최우종(35) 씨도 전 직장에 비해 연봉이 1,000만원 정도, 각종 수당까지 합치면 2,000만원이나 깎인 사례다. 최 씨는 "정신적으로 편안한 삶을 택하겠다고 결심해 회사를 옮겼는데 막상 가계를 꾸리려니 여간 팍팍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이직을 생각할 때 최우선적인 고려의 대상은 연봉이다. 인크루트가 이직을 고려한다는 236명의 직장인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직 조건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연봉 인상 여부가 1위(31.8%)를 차지했다. 하지만 불경기로 인해 허리띠를 조여매는 현 상황에서 무조건 연봉만 우선시할 수는 없는 노릇. 오히려 안정성과 비전을 고려하는 직장인이 늘면서 '비전이 있는 기업'(23.7%), '복리후생이 좋은 기업'(22.9%), '직무가 적성에 맞는가'(18.6%) 등의 조건을 따지는 직장인들도 늘었다. ■이전 직장에서 쌓은 노하우로 자신을 빛내라! 강원도개발공사 알펜시아 사업본부에서 근무하는 오정근(42) 과장은 대기업에서 나와 벤처기업을 창업했다가 현 직장으로 옮기면서 쌓은 인맥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새 조직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케이스다. 오 과장은 "벤처 기업을 정리하고 모 회사에 경력 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대기업의 업무 경험과 벤처 기업을 경영하면서 쌓은 경영자적인 마인드로 회장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존 직원들 사이에 경계심이 높아지면서 금세 그를 소외시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는 각개격파를 해 나가기로 마음먹고 사원들의 소그룹 술자리부터 찾아 같이 어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가 모임에 끼는 것조차 꺼려하더니 조금씩 진심을 알아주고 나중엔 직원들과 가족처럼 지내게 됐다고 한다. 패션업체 홍보팀에서 일하는 양영선(37) 씨는 "경력 사원으로 일한다는 것은 총 들고 싸울 준비는 돼있으나 어디로 총을 쏴야 할지 모르는 '반쪽짜리 군인'과 같다"고 표현했다. 수 차례 이직 경험이 있는 양 씨는 "조직에서는 경력 사원이 조직의 일원으로 동화되기도 전에 역량부터 보고 싶어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문제"라며 "실무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폭 넓은 지식은 가지고 있지만 정작 신입사원보다 더 조직에 동화되기 어려워 신입사원보다 더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애 어른'인 셈"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경력 사원이 새 조직에 융화돼 제대로 된 몫을 하도록 하려면 직원 개인의 노력과 역할 은 물론 조직과 구성원의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양 씨는 "조직의 비전과 경력으로 뽑힌 직원의 비전이 조화를 이루고 이를 통해 그의 능력이 100% 발휘되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력 사원 자신들도 누구보다 프로의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취업컨설팅 전문가인 이우곤 HR연구소장은 "이직 이후 가장 중요하게 신경 쓸 부분은 '조직 적응'이며 그 다음에는 프로의식을 발휘해 곧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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