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벼랑끝 종합상사] 2. 분식회계의 안과 밖

대우그룹에 이어 SK글로벌로 이어지는 대기업들의 잇따른 분식회계 파문은 국내 경기를 위축시키고 국가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등 국가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분식회계의 시시비비는 반드시 가려야 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일벌백계(一罰百戒)로 다스려야 한다는 여론도 들끓고 있다. 영업이익을 부풀리고 비자금 마련을 위해 회계장부를 조작하는 것은 기업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투자자를 기만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은 우리나라 기업의 주가가 실제 기업가치보다 낮은 이유로 기업 일반에 만연된 분식회계 의혹을 거론하고 있다. 물론 1차적 책임은 해당 기업에게 있다. 그러나 과연 기업만의 잘못일까하는 문제는 의문으로 남는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고 현재의 잣대로 과거의 모든 일들을 재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분식(粉飾)은 잘못된 관행이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90년~2000년까지 11년동안 감리를 받은 1,544개 기업 가운데 35%인 540개사가 분식회계를 벌이다가 감독당국에 적발됐다. 국내 기업 3개중 1개 이상 꼴로 분식회계를 했다는 얘기다. 또 최근 금융감독원이 김부겸 한나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0년부터 올해 3월말까지 분식회계로 적발된 기업은 모두 190개(204건)에 달했고 10대 대기업 집단중에서는 7곳이 분식 혐의로 적발됐다. 기업에 대한 금융당국의 감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90년대 들어서도 분식은 끝없이 이어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70, 80년대의 분식은 기업의 관행처럼 여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우가 무너진 후 야인이 된 전 대우그룹의 고위 임원 A모씨는 “분식 행위를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환란 이전 우리나라에서는 적자 기업에 대출을 해주면 대출해 준 은행직원이 징계를 받았다”며 “적자가 났더라도 성장성을 보고 돈을 꿔주던 외국은행과는 달리 흑자 서류만을 대출의 필수조건으로 강요하던 국내 은행들은 심지어 분식인 줄 알면서 대출을 해준 경우도 허다하다”고 말했다. 여기에 정경유착은 분식회계에 대한 기업들의 `도덕 불감증`을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전직 대통령들이 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수천억원이 넘는 정치자금은 분식회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수출로서 기업의 능력이 평가받던 시절, 수출금융을 통한 분식회계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고 분식의 한 가운데 종합상사가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매출 경쟁속에 부풀어진 분식=지난 9일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사건 결심공판. 손길승 SK회장은 “부실이 부실을 낳는 것을 보며 술 없이 잠을 이룰 수 없는 날이 많았다”며 최후진술을 시작했다. 어찌 보면 최고경영자로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그러나 손 회장의 최후진술에는 정부의 고강도 수출 최우선 정책 속에 어쩔 수 없었던 종합상사의 운명이 담겨져 있다. 70년대 `코리아`라는 이름 조차 낯설던 세계인들을 상대로 우리 제품을 세일즈해야 했던 상사맨들은 시장 개척을 위해 막대한 투자 비용이 필요했다. 또 그 시절에는 중소기업 제품 수출을 위해서는 종합상사가 운영자금을 선불로 내줘야 했었다. 종합상사들은 당장 은행 돈이 필요했고, 은행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서는 시장개척도 안된 상황에서 흑자 재무제표가 있어야만 했다. 이 때부터 장부조작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부실이 부실을 낳는 악순환의 단초가 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연간 5,000만달러 수출 실적 등 까다로운 종합상사 선정기준을 마련했지만 일단 종합상사가 되면 금리인하, 낮은 환율 적용 등 수많은 금융 혜택을 줬다. 종합상사들은 이때부터 동일 수출을 가지고 연거푸 실적을 올리거나 해외 유령회사를 통한 거짓 수출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분식을 통한 매출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SK글로벌 분식회계 이후]SKG 유전스 단독조작 여부 관심속 "예전엔 당연시" 종합상사 좌불안석 SK글로벌 분식회계 파문을 지켜보는 다른 종합상사들의 속내도 편치 않다. 또 과거 사례를 비춰볼 때 SK글로벌의 분식회계가 단독으로 가능했는지 여부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 70년대부터 20여년동안 관행처럼 이어져 온 분식회계를 하루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종합상사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최근 모 종합상사의 최고재무관리자(CFO)는 “SK글로벌처럼 유전스(기업간 기한부 어음)를 통한 분식회계는 90년대 초반까지도 일반화돼 있던 것 아니냐”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종합상사들은 환란이후 상당부분 부실을 정리했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들이 지금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전스 조작뿐만 아니라 가공매출이나 재고누락 등의 분식까지 합치면 70, 80년대 분식회계로부터 자유로운 종합상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한편 전 대우 그룹의 임원은 “과거 종합상사의 분식에는 금융기관도 직ㆍ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환란 이전에는 금융기관들이 분식을 알면서도 종합상사라는 타이틀만 보고 대출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역시 과연 단독으로 유전스 조작이 가능했을지 의심의 여지가 남는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수입을 할 경우 해외법인이나 외국기업에 물품대금으로 90~120일이 기한인 유전스(기한부어음)를 지급하는데 기한이 남은 유전스는 결산때 부채로 잡힌다. SK글로벌은 1조2,000억원 규모의 유전스 잔액을 없는 것처럼 위조해 부채를 누락시켜 적자기업을 흑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유전스 조작은 거래은행이 발급해 외부감사인에게 제출하는 은행조회서의 조작으로만 가능하다. 은행조회서에는 발급 은행 지점장의 관인이 있어야만 한다. SK글로벌의 경우 검찰 수사에서 지난 2001년 50여개의 은행조회서를 위조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과연 은행의 협조 없이 가능했는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 [분식회계 유형]허위매출ㆍ빚줄이기 신용조회서 조작도 분식회계란 기업이 고의로 자산이나 이익 등을 크게 부풀리고 부채를 적게 계상함으로써 재무상태나 경영성과 등의 변동 사항을 고의로 조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분식회계는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차입할 때 또는 주가 관리를 위해 매출을 늘리거나 자산의 가치를 과대 평가, 비용이나 부채를 줄여 재무제표(financial statement)를 작성하는 방법으로 이뤄진다. 분식회계는 자본주의 역사가 오래된 선진국에서도 아직까지 뿌리를 뽑지 못하고 있다. 과거 국내ㆍ외 기업들이 주로 사용했던 분식회계의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본다. ◇가공매출액 계상=가공매출액이란 제품을 제조해 팔지 않으면서 허위로 만든 매출을 의미한다. 또 제품을 생산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매출이 일어난 것처럼 재무제표에 매출액을 계상하는 방법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경우 장부에는 제품 생산비용이나 마케팅 비용이 전혀 포함되지 않은 상태에서 매출만 늘어나게 돼 당기순이익은 실제 보다 증가하게 된다. 당기순이익의 증가는 부채비율을 낮추고 기업의 재무 상태가 건실함을 나타내 기업의 금융권 차입이나 주가 상승의 재료로 활용된다. 외부감사인은 영수증이나 계약서만으로 기업의 매출을 확인하기 때문에 영수증이나 계약서 조작만으로 손쉽게 가공매출액 계상이 가능했다. ◇재고자산 과다 계상=재고자산은 기업이 생산한 제품을 팔지 못해 물품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기업이 현금화할 수 있는 재산에 포함된다. 재고자산 과다 계상은 재고 수량을 늘리는 방법이 가장 널리 사용돼 왔다. 그러나 외부감사가 점차 실제 재고량 파악 등 까다로워 지면서 재고자산 과다 계상은 점차 모습을 감추고 대주주가 주식을 가지고 이익을 부풀려 자산을 늘리는 방법이 쓰이기도 한다. 지난 2001년 발생한 미국 엔론은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를 만든 후 부채와 유령회사의 주식을 맞바꾸는 방식으로 자산을 늘려 주가 상승을 꾀하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덜미를 잡혔다. ◇부채의 과소 계상=말 그대로 부채를 재무제표에서 누락시키는 분식회계 방법 중의 하나다. 부채가 높은 기업은 자본시장에서 낮은 평가를 받게 돼 가능한 한 부채는 낮은 수준에서 유지하는 것이 기업의 입장에서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차입금 등 부채를 줄여 재무제표에 표시하기 위해서는 금융기관이 발행한 `은행(신용)조회서`까지 조작해야 하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다. 그러나 외부감사인들은 감사시 `은행조회서`는 금융기관이 발행한 감사서류인 만큼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 기업들이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많았다. 한편 손실을 이익으로 부풀리는 장부조작도 분식회계시 흔히 쓰이는 방법이다. 미국의 벤처신화를 창조했던 월드컴이 지난 2001년 파산한 것은 99년부터 1년3개월간 38억5,000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은폐해 이익을 늘린 분식회계가 적발됐기 때문이다. <한동수기자 best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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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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