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려면 게을러져라.`
20세기의 지식인 버트랜드 러셀이 그의 저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통해 도시병에 찌든 이들에게 내린 처방전이다. 그는 사람이 게으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창조할 수 있고 또한 가벼운 마음으로 사색하며 즐길 수 있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들의 생활을 돌이켜보자. 늘상 바쁘다. 왜 바쁜지 생각해볼 여유도 없이 바쁘다. 휴일에 휴식을 취할 때조차도 시간을 쪼개어 이런 휴식, 저런 휴식을 바쁘게 쫓으며 살고 있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바쁠까. 바쁘지 않으면 낙오할 것 같아서 인가. 바쁘지 않으면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아서 그런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만히 보면 스스로 바쁘다고 최면을 걸면서 지내고 있다. 그러면서 아이러니컬하게도 좀더 여유 있고 편안하게, 어쩌면 게으르게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듯 바쁘니 다른 사람을 살필 여유가 없다. 그러니 삶이 메마르게 되고 남을 배려할 여력이 없다. 배려가 없는 사회는 경쟁과 반목만이 지배하게 된다. 결국 사회적 가치가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이제 조금만 게을러지자. 생활인으로서 경쟁에서 낙오되거나 스스로 맡은 사회적 역할을 방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라도 모든 것을 잊고 마음 저 아래에서부터 한번 게을러져보자. 능률과 성취를 위해 숨 가쁘게 달리는 사이, 두드리던 자판을 잠시 멈추고 한번쯤 여유 있게 게을러보자. 달리는 차들 사이로 계절을 따라 붉게 물들고 있는 단풍잎들이 보일는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동료의 풀어진 신발끈이 보일는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서랍 속에만 넣어두었던 학창시절 앨범을 한번 꺼내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쩍 커버려 안아주기가 어색해진 아이의 모습이 멋쩍을 수도 있다. 마음의 나이를 훌쩍 지나버린 내 모습이 어색해 보일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이 그리 짧지 않다면 그런 게으름 정도는 스스로 이해해주자. 결코 어리석은 시간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다시 즐겨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멈추었던 자판을 두드리도록 하자.
러셀은 게으름이야말로 창조와 선량함의 원천이므로 찬양받아야 한다고 외쳤다.
<김세호(철도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