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리빙 앤 조이] 韓紙(한지), 韓流(한류)가 되다

'한번의 붓질'을 위한 '백번의 손질'<br>宋나라 때부터 인정한 명품<br>예술작품 소재 등 영토확장<p>대 이은 장인육성 서둘러야


2009 전주한지문화축제의 한지 패션쇼

한지로 꾸민 김대중도서관


한국 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 최근 101번째 작품 '달빛 길어올리기'의 제작발표회를 열었다. 그동안 '서편제'의 판소리, '취화선'의 한국화 등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문화를 영상에 담아 전 세계인들에게 알려온 임 감독이 이번에 야심차게 준비한 소재는 바로 우리의 전통 한지(韓紙)다.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어왔지만 인쇄 문화의 발달과 값싼 수입산 종이의 범람에 밀려 점차 퇴색하고 있는 한지의 숨은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의도에서다. 그의 바람대로일까.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학계, 한지업계를 중심으로 한지의 힘찬 부활을 위한 노력들이 하나둘 기지개를 펴고 있다. 국내 한지의 역사와 현황 등을 총 집대성한 '한지대전' 발간에서부터 한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적극적인 해외 홍보 및 국내 한지 장인 육성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한지 부활 프로젝트'가 시동을 걸었다. 한지의 본고장 전북 전주시를 찾아 부활을 꿈꾸는 한지의 숨은 매력과 함께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 등을 짚어봤다. ◇한지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한지가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600년경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한지는 섬유를 잘게 갈아서 만드는 중국의 제지법과 달리 긴 섬유를 두드려 균일하게 만드는 방법을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이 기술은 610년경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우리의 한지를 일본에 전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는 한지가 가장 왕성하게 발전한 시기로 국가적으로 닥나무 재배를 널리 장려하기도 했다. 당시 불교의 성행으로 불경을 만드는 데 쓰이는 종이 사용량이 크게 늘어난데 따른 것이다. 한지는 조선시대에 부흥기를 맞는다. 한지의 원료와 제조기술이 한층 다양화되고 문서와 서책, 화폐, 모자, 부채 등 일상용품으로까지 용도가 대중화됐다. 세조 12년에는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제지공장 '조지서'가 만들어졌고 관아에 소속된 장인 외에 민간에서 만든 종이로 다양한 한지공예품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한지는 사양길로 접어든다. 대량생산과 비용절감을 앞세운 서양식 제지공장이 설립되면서 제조공정이 까다롭고 원료 수급이 어려운 한지를 대체하기 시작한 것. 이후 국내 한지산업은 급격히 위축되면서 한 때 전국적으로 5만개가 넘던 한지 생산업체수는 현재 20여곳에 불과하다. ◇한지의 우수성과 매력= 한지는 예로부터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과거 송나라 문인들 사이에선 당시 고려지(한지)가 최고의 선물 중 하나였는데 시인 소동파도 고려지를 즐겨썼다고 전해진다. 자금성에도 고려지가 사용됐고 청나라 건륭황제가 말년을 보낸 권근제 역시 고려지로 도배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궁 창고 안에 보관중인 고려지가 본래의 색과 모양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모두 750년경에 간행됐지만 보존상태가 완벽에 가깝다. 송미령 예원예술대학교 한지조형디자인학과 교수는 "닥나무를 주원료로 쓰는 한지는 삼지닥나무를 사용하는 일본의 화지나 잡목과 볏짚을 섞어 만드는 중국 선지에 비해 섬유질의 길이가 길어 통기성과 내구성이 훨씬 더 우수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종이에 구멍을 낸 다음 잡아당겼을 때 어느 정도의 힘까지 버티는지를 측정한 실험 결과 일본의 화지와 중국의 선지가 강도 100에서 쉽게 찢어진 반면 한지는 900 이상의 수치를 기록했다. 한지는 미적 가치도 자랑할만하다. 송미령 교수는 "한지는 단순히 종이의 개념을 뛰어넘어 훌륭한 예술작품이나 인테리어 소재로도 손색이 없다"고 극찬한다. 이를 입증하듯 지난 2005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동아시아 16개국 정상회담 당시 한지장식으로 꾸며진 한국관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문전성시를 이뤄 바로 건너편에 자리한 일본관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전주의 한지제조업체인 천양제지㈜는 지난 12월 500만원 상당의 한지 벽지를 미국 뉴욕의 대형 건축자재백화점에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번에 수출하는 벽지는 천양제지가 전주 닥나무를 이용해 만든 주택용 친환경인증 벽지로 매장에 전시된 한지 벽지를 본 고객의 요청에 따라 전격 수출이 결정됐다. 한지의 세계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2007년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미국 뉴욕 관저 내 게스트룸이 전주 한지로 꾸며지기도 했다. ◇백 번의 손길이 닿는 한지= 한지는 백 번의 손길을 거쳐서 만들어진다고 할 정도로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한다. 매년 11월~1월경 닥나무를 베어내 하루 동안 증기로 찌고 닥껍질을 벗겨내면 흑피가 된다. 이를 다시 흐르는 물에 불려 겉껍질을 벗기면 백피가 되는데 백피는 햇볕에 잘 말린 후 잿물에 삶는다. 잿물을 씻어내고 다시 물 속에 담가 햇볕을 쬐고 일일이 손으로 티를 제거한다. 원료를 돌판이나 나무판 위에 올려놓고 곤죽이 될 때까지 방망이로 두드리면 부피가 처음 백피의 두 배 정도로 불어난다. 황촉규 뿌리를 비벼서 만든 닥풀을 첨가한 물에 원료를 풀고 종이를 뜬다(나무발 위로 건져냄). 한지는 전통방식인 외발(흘림)로 뜨는데 물을 세로, 가로, 세로 방향으로 번갈아 흘려보내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종이결을 얽히게 만든다. 특히 두 장의 습지를 하나로 합쳐 합지를 만들기 때문에 종이가 더욱 질기고 강해진다. 이렇게 떠낸 종이를 400~500장 쌓아두고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 물을 뺀 뒤 젖은 종이를 펴고 비로 쓸어가면서 천천히 고르게 말린다. 마지막으로 말린 종이의 밀도를 높이고 표면을 윤기 있게 만들기 위해 디딜방아나 홍두깨로 두드린다. ◇부활의 날개 펴다= 한지의 부활을 위해 가장 바쁘게 뛰고 있는 곳은 전북 전주시. 지난 2008년 전국 지자체에서는 최초로 한지 업무만을 전담하는 한지팀을 신설한 데 이어 오는 7월 전국 최초의 한지연구소인 한지산업진흥원 개원도 앞두고 있다. 오길중 전주시청 한지담당 계장은 "한지산업진흥원은 기술개발과 전문인력 양성, 경영컨설팅 및 마케팅 지원 등을 통해 그동안 판로부족 등으로 영세성을 면치 못하던 국내 한지생산업체들의 도약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주시는 또 값싸고 우수한 한지 원료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닥나무 재배단지를 확대 조성하고 오는 4월 전주한지의 지리적표시 단체표장 등록 추진을 통해 전주 한지의 브랜드화에도 나설 계획이다. 이 밖에 강원도 원주시는 사업비 141억원을 투입해 한지박물관과 한지공원을 조성중이며 경북 청송군은 전통 한지를 이용한 '한(韓)문화' 체험코스를 개발하는 등 각 지자체마다 한지 부활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지의 과거와 현재를 보존하기 위한 작업도 시작됐다. 국민대학교 임산공학과 김형진 교수가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지난 1년간 전국의 한지업체를 돌며 수집한 310종의 한지와 정보 등을 모은 국내 최초의 한지 백과사전 '한지대전'이 오는 30일 출간된다. 문화관광부는 전주시와 손잡고 총 206책의 조선왕조실록을 복원하는 사업을 오는 4월경 완료한다. 김성진 문화관광부 국어민족문화과 사무관은 "특히 올해 국내에서 G20 정상회의가 열리는 만큼 이번 기회를 한지 홍보에 적극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지 부활의 과제= 전문가들은 한지가 온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종이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선 한지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과 함께 한지의 신규 수요처 발굴을 통한 산업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올해로 50년째 한지 만드는 일을 해온 김태복(64) 장인은 "현재 한지를 만드는 사람들의 연령이 대부분 40대가 넘는데 이들이 은퇴하면 과연 명맥이 이어질지 걱정"이라며 "하루 빨리 한지 장인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미령 교수도 "중국은 선지 공장을 국가가 직접 운영하고 일본은 화지 장인에 대한 육성 및 보존정책이 잘 마련돼 있다"며 "정부가 발벗고 나서 전통 한지 육성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지를 활용한 의복이나 공예품, 벽지 등으로 활용범위를 넓히는 작업도 필수다. 일본의 경우 각종 포장재나 우편봉투, 엽서 등에 화지가 사용되며 화지로 만든 전등을 세계적인 생활가구용품점 '이케아'에 공급하고 있지만 우리 한지는 박물관이나 책 속에서 접하는데 그친다. 한지 품질표시제 또한 시급한 숙제다. 한지품질표시제는 한지에 생산자와 원산지, 물리적 특성, 제조일자 등을 표기해 한지의 신뢰성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자는 것. 김형진 교수는 "국내 한지 생산업체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인사동에 직접 공급하는 업체는 극히 드물 정도로 수입산 한지가 시장을 어지럽히고 있다"며 "한우가 원산지 표시제 도입 이후 수입산 쇠고기를 물리치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듯 한지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무엇보다 품질표시제가 실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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