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은행권이 유럽연합(EU)의 구제금융을 받아 급한 불을 끌 수 있게 되면서 다급하게 돌아가던 유럽 재정위기가 일단 한 고비를 넘기게 됐지만 위기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당장 오는 17일 치러질 그리스 2차 총선과 그로 인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여부가 시장을 뒤흔들 메가톤급 변수로 남아 있다. 스페인에 대한 1,000억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이 시장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일각에서는 스페인이 최종적으로 최대 4,500억유로의 구제자금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은 당분간 유로존 위기에 따른 불안감을 떨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그리스 2차 총선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1차 총선 이후 지난 2일까지 실시된 31차례의 여론조사에서 긴축안을 지지하는 신민당은 27%대의 안정적인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 반면 긴축에 반대하는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은 20~30% 선에서 등락폭이 커 1위 정당을 선뜻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금융시장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시리자가 주도하는 좌파정부 탄생으로 그리스가 구제금융 재협상을 요구하고 나서는 시나리오다. 독일 등 유로존 국가들이 구제금융 조건 재협상은 없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은 상황에서 시리자 정권이 들어설 경우 이는 장차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유로존 이탈은 주변국을 비롯한 유로존 회원국들의 도미노 신뢰 추락과 유로존 붕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 총선 결과는 유로존의 앞날을 좌우하게 될 핵심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8일(현지시간)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는 그리스 탈퇴 리스크가 키프로스ㆍ포르투갈ㆍ아일랜드ㆍ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신용도에 특히 영향을 미치겠지만 만일 그리스가 유로존을 떠날 경우 신용등급 'AAA'인 국가들을 포함해 모든 유로존 국가등급이 재검토 대상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스 변수는 재정위기국에 투자한 투자자들의 손실을 가중시키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 유로화 존속 자체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무디스는 강조했다.
반면 총선에서 신민당이 1당을 차지하고 사회당 등과 힘을 합쳐 정부 구성에 성공할 경우 그리스는 일단 큰 고비를 넘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들이 연정 구성에 성공할지 여부는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때문에 그리스 정치권에서는 신민당과 시리자 어느 쪽이 1당이 되든 정부 구성이 또다시 난항을 겪을 수 있다며 3차 총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 경우 그리스의 정치혼란 장기화로 기존에 약속됐던 구제금융 집행 여부가 불투명해지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은 더 깊은 불안의 늪으로 빠져들 것으로 우려된다.
스페인도 이번 구제금융 약속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00억유로가 불길에 휩싸인 스페인 은행권을 구제하기에 충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벌써부터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찰스 디벨 로이드뱅킹그룹 이코노미스트는 스페인에 대한 구제금융 발표 후 보고서를 통해 "1,000억유로의 구제금융은 치유가 아니라 방어, 성장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자금"이라며 "(위기극복을 위해) 충분한 수준인지는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도 9일 은행권에 대한 자금지원으로 스페인 문제가 해결될지는 '커다란 도박'이라며 구제금융 이후 스페인 국채발행 여건이 개선될지 여부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만일 시장에서 정부의 자금조달 여력이 개선되지 못해 은행들이 구제금융 자금을 계속 국채매입에 소진하게 된다면 스페인의 은행 시스템은 다시 문제의 출발선으로 돌아가고 스페인 정부는 자금수요를 충당하지 못해 대규모의 전면 구제금융으로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8일 데일리 텔레그라프는 시장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해 스페인에 대한 구제금융 규모가 최대 4,500억유로에 달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루비니글로벌이코노믹스의 메간 그린은 스페인 은행 구제에 소요될 자금이 2,500억유로 규모에 달할 것이라고 내다봤으며 RBS는 스페인에 대한 총 구제금융이 역사상 최대 규모인 3,700억~4,500억유로까지 부풀어오를 것으로 전망했다고 신문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