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트럭행상·노점으로 장사 노하우 터득 수백억 매출 올려도 저는 여전히 야채장수죠
한겨울 200원짜리 장갑 사기 아까워 맨손으로 일하며 악착같이 돈 벌어
첫 가게서 60억 매출 일궜지만 지금도 명함엔 대표 직함 안새겨
재래시장도 튀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60세에 농수산물 테마파크 설립이 꿈
트럭 행상으로 돈벌이에 나선 한 20대 청년은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아버지 산소 앞길 닦기. 둘째,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 갚기. 셋째, 어머니 집 사드리기. 청년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처절하게 돈을 아끼고 모았다.
한 달 용돈 2만원으로 생활하고 벌이의 90% 이상을 저금했다. 친구도 못 만났고 연애는 꿈도 못 꿨다. 칼바람 부는 겨울에도 200원짜리 장갑 하나 사는 게 아까워 맨손으로 일하기도 했다. 밥값이 아까워 점심은 거의 안 먹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아끼고 열심히 일한 청년은 6년 만에 세 가지 목표를 모두 이뤄냈다. 빚쟁이에게 시달리다 어두운 밤에만 경사가 심한 아버지 산소 길을 오르던 어머니는 그제서야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그러고도 죽을 둥 살 둥 돈벌이에 매진한 그는 현재 연매출 600억원의 농수산식품유통업체를 운영하는 사장이 됐다. 그가 바로 '총각네 야채가게'를 운영하는 이영석(45·사진) '자연의모든것' 대표다.
7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위치한 본사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으레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누던 기자는 순간 멈칫했다. 명함에 대표 직함이 빠진 것. 그 자리에는 '야채 장수'라고만 써 있었다.
"저는 야채 장수일 뿐"이라고 힘주어 말한 이 대표는 "매출도 얼마 안 되고 대표는 저한테 어울리지 않는다"고 짧게 이유를 밝혔다. 스스로를 장사꾼이라고 강조하는 이 대표의 진면목은 두 시간 남짓한 대화를 통해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 대표는 대학을 다닐 때만 해도 야채 장사꾼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는 "서울대 같은 명문대를 나왔다면 지금쯤 회사를 다니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겠지만 공부도 잘 못했고 그 분야에서 성공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며 "또 무식했고 부모님 도움을 받을 형편도 못됐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내 수준에서 부자가 되기 위한 꿈을 이루려면 야채 장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야채 장사를 시작하기 전 이 대표는 2년 정도 오징어 행상을 따라다녔다. 제대로 장사하는 법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월급도 한 푼 안 받았다. 이 대표는 "절실한 사람은 난데 그게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덧붙여 "많은 사람들이 대가도 치르기 전에 보상부터 원한다"고 꼬집었다.
이후 트럭 행상을 시작한 이 대표는 수도 없이 싸우고 맞고 다녔다. 과일을 사기 위해 서울 가락시장을 찾은 그는 사기를 많이 당했다. 이 대표는 "상인들이 위에는 좋은 물건, 아래는 나쁜 물건을 깔아놓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위쪽 과일이 좋으면 샀다"며 "그런데 막상 팔 때 보니 상한 과일이 많아 다시 시장으로 찾아가 바꿔달라 요구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당시 시장 관행상 농수산물은 반품이 안 됐고 그에게 돌아온 것은 좋은 과일 대신 욕과 주먹이었다. 그는 "그래도 포기하기 않고 바꿔달라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며 "한번은 상인 서너 명에게 둘러싸여 맞기도 했다"고 씁쓸해 했다. 괴로웠지만 참고 견뎌냈고 결국 상인들은 그를 '독한 놈'이라 여기고 더 이상 건드리지 않게 됐다. 이후 그가 좋은 품질의 과일과 채소를 차지하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6년 넘게 트럭 행상을 하다 노점상으로 정착했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았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노점 단속을 강화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것.
총각네 야채가게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 대표는 행상과 노점으로 모은 돈을 탈탈 털어 지난 1998년 서울 대치동에 첫 가게를 열었다. 처음에는 장사가 안 됐다. 그는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먼저 재고를 남기지 않는 전략을 택했다. 문닫을 즈음 상품을 모두 가게에서 빼내 장사가 잘된다는 이미지를 고객들에게 심어줬다.
또 '팁 받는 야채 장사'를 목표로 잡았다. 이 대표는 "호텔이면 몰라도 야채가게에서 팁을 받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라며 "그만큼 친절함과 서비스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직원들에게 당부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서비스 마인드를 키우니 입소문이 나고 장사도 술술 풀렸다. 결국 그가 서른 살이 되던 해 18평 가게에서 60억원이라는 엄청난 매출을 올리게 됐다.
지금은 총각 딱지를 떼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기는 했지만 그는 15년 동안 매일 새벽1시15분에 일어났다. 새벽2시부터 5시까지 시장에서 경매에 참여해 물건을 사고 5시부터는 매장에 상품을 공급했다. 매장 분배를 마치면 오전10시. 이후 사무와 판매 업무를 보는 그는 오후에는 매장 점검을 다녔다. 가게는 오후7시30분에 문을 닫았다.
누구보다 부지런해 보이는 이 대표지만 그는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지금도 끔찍하다"며 "알람시계 5개를 맞춰놓고 잠든다"고 말했다. 그는 "그만두고 싶은 마음 49%, 일하고 싶은 마음 51%인데 그 1%의 차이가 나를 일하게 만든다"며 미소를 지었다.
총각네 야채가게의 승승장구 비결은 무엇보다도 엄격한 품질관리와 서비스에 있다. 대형마트와의 경쟁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대표는 "사실 우리 가게 상품이 싸지는 않다"며 "그대신 품질은 철저하게 챙긴다"고 대답했다. 또 재래시장을 예로 들면서 "무조건 불평만 하지 말고 대형마트 이상의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실제 총각네는 고객의 미숙으로 품질이나 맛에 불만이 있을 때도 아예 상품을 교환해주는 등 차별화된 전략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최근 경기침체와 경쟁 심화로 힘든 소상공인들에 그는 "경기가 안 좋아서 힘들다고 하지만 경기가 아무리 좋아도 문 닫는 가게는 있기 마련"이라며 "걱정하고 탄식할 시간에 장사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라"고 주문했다. 실제 트럭 행상 초기에 바나나를 팔았던 그는 어떻게 잘 팔까 생각하다가 당시 300만원이나 하는 원숭이를 샀다. 그는 "원숭이를 데리고 다니니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아이들이 몰리면서 장사가 잘됐다"면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찾아내면 재미있게 일하고 매출까지 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총각네는 올 초 충청북도 청양군과 업무협약을 맺은 데 이어 지난달 강원도 횡성군과도 협약을 체결하는 등 지방자치단체들과 손잡고 우수한 지역 농특산물 공급에도 앞장서고 있다. 회사는 안정적 농산물 공급처를 확보하고 지자체는 판로를 개척할 수 있게 돼 상호 윈윈할 수 있게 됐다.
총각네 야채가게는 농수산식품 프랜차이즈 형태를 띠고 있지만 보통의 프랜차이즈와는 다르다. 회사는 외부인의 가맹점 창업 신청을 받지 않고 있다. 회사에서 일을 배운 직원들이 가맹점 창업을 하고 있다. 이 대표는 "같이 일하던 직원들이 성실하게 장사를 배울 만큼 배웠다고 판단되면 매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며 "독립할 돈이 없으면 점포를 얻는 비용도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이 대표지만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 50세에 창업사관학교를 세우고 60세에 농수산물 테마파크를 설립하는 게 그의 꿈이다. 농수산물 테마파크와 관련해 이 대표는 "도심 속에서 소ㆍ닭ㆍ돼지ㆍ식물들을 직접 키우며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며 "아이들이 게임에 몰두하기보다 자연을 통해 배우고 같이 어울려 놀면서 성장했음 좋겠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 이영석 대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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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직원 여장 등 연중 다양한 이벤트 고객이 즐거운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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