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슬픈 약속

“새끼손가락 고리 걸고 꼭꼭 약속해.” 어린아이들이 약속을 할 때 즐겨 부르는 동요의 한 구절이다. 하지만 이들도 약속이라는 게 깨지기 쉽다는 것을 아는 모양인지 계속 약속을 다짐하는 방법과 절차가 진화한다. 처음에는 단지 새끼손가락을 걸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새끼손가락을 건 뒤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는다. 이제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은 뒤 서로 손바닥을 맞대면서 ‘복사’라고 말한다. 약속을 복사까지 해놓았으니 반드시 지키라는 얘기다. 여기서 더 나가 복사를 한 뒤 손바닥에 사인하는 절차를 추가한 아이들도 있다. 약속에 대한 그들 나름의 삼중ㆍ사중 잠금 장치다. 사회 곳곳 믿음 껴져 불협화음 지금 사회 곳곳에서 약속이 어긋나면서 불협화음이 터져나오고 있다. 두산그룹의 오너 형제간 다툼이나 X파일 사건도 따지고 보면 믿었던 약속의 뒤틀림이 그 근원이다. 두산그룹 형제의 난은 어느 쪽이 옳든, 다른 한쪽이 흑심을 품고 당초 다짐했던 우의와 화합경영을 훼손하고 있다는 의심에서부터 촉발됐다. 한쪽이 경영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의심은 결국 비자금 폭로로까지 비화돼 검찰수사 대상이 되고 절연(絶緣)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X파일 사건도 그 밑바탕에는 비슷한 기류가 흐른다. 이번 불법도청은 그동안 수없이 “도청은 없다”고 공언해온 과거 정권이 국민과의 약속을 스스로 깬 사건이다. 또 불법 테이프가 유출되고 공개되는 과정도 비합법적인 약속이었을지언정 이것이 깨지면서 불거졌다. 옛 안기부의 특수도청팀장은 이 팀의 구성과 해체, 재구성의 과정에서 조직에 대한 배신감과 도태 의식이 겹쳐지면서 도청 테이프를 빼돌렸고, 이 테이프를 언론사에 넘겨준 재미교포와의 관계에서 약속이 어그러지면서 사건이 터졌다. 약속은 항상 믿음에서 시작되지만 위험을 수반한다. 약속이 어그러질 경우 단순히 등을 돌리는 차원을 넘어 총구를 겨눌 수도 있다. 이를 발단으로 파국도 맞는다. 이들 두 사건의 비방과 폭로가 그 범주에 해당된다. 두산그룹 사건과 X파일 사건으로 재벌개혁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도 그동안 수없이 천명해온 정도(正道) 경영의 약속이 공염불이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안을 현 정권으로 돌려보면 역시 수많은 약속의 어그러짐이 있다. 1년 전의 일이다. 추석을 맞아 이 정권은 1년 뒤 피부로 느끼는 경제회복을 약속했다. 다음 추석에는 올해의 어려웠던 살림을 추억처럼 얘기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어깨가 처진 국민들을 달랬다. 단순한 덕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국민들은 그럴 것이라 믿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초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에서도 올 한해를 경제회복에 올인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추억이 아니라 여전한 현실이다. 연초 경제회복 약속 기억해야 물론 경제회복에 대한 약속이 맘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지만 이보다 다른 곳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참여정부 시대에 독재자라는 이중성을 가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여전히 전임 대통령 중 가장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은 현 상황이 오버랩되며 경제발전을 이뤄낸 지도자에 대한 향수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지킬 만한 좋은 기억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약속의 미학이다. 한번 한 약속에 대해서는 끝까지 지키는 계포일낙(季布一諾)의 교훈도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세상이 꼬이고 있다. 약속을 할 때마다 일일이 도장을 찍고 복사를 하고 사인까지 받는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한다면 어쩐지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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