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2월13일] 윌리엄 쇼클리

[오늘의 경제소사/2월13일] 윌리엄 쇼클리 권홍우 편집위원 쇼클리(William Shockley)는 천재로 통했다. 과학을 쉽게 풀이하는 재주도 뛰어났다. ‘증폭’에 대한 그의 설명. ‘당나귀 꼬리에 성냥을 그어봐라. 성냥을 켜는 데 소모한 에너지와 꼬리에 불이 붙은 당나귀가 뛰는 힘의 차이가 바로 증폭이다.’ 1910년 2월13일 영국 런던에서 미국인 광산기사의 외아들로 태어나 세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증폭’에 반평생을 바친 인물. 트랜지스터 개발의 주역이다. 무겁고 비싸며 열 때문에 잘 터지던 진공관을 대신할 증폭기의 가능성을 논문으로 발표한 게 AT&T의 벨연구소에서 일하던 1939년. 전쟁으로 중단된 연구가 재개된 1947년에는 트랜지스터를 개발해냈다. 문제는 공명심. 8년간의 연구 끝에 봉착한 마지막 난관을 쉽게 뚫은 후배 바딘과 브래튼에게 밀리고 회사에 요구했던 특별대우가 거부되자 그는 1956년 고향에 쇼클리연구소를 차렸다. 실리콘밸리가 형성된 게 이때부터다. 노벨 물리학상도 공동 수상했다. 이 시절이 그의 정점. 연구소에 최고 인재 12명을 불러들였지만 경영자로서 그는 낙제였다. 연구원들의 지능을 검사하고 경쟁을 부추긴다며 벽에 봉급일람표를 붙였다. 결국 기행을 못 견딘 핵심 연구원 8명이 독립해 ‘페어차일드반도체’를 세웠다. 인텔과 AMD가 여기서 갈라져 나온 회사다. 최고의 과학자였지만 최악의 경영자(CEO)였던 그는 사업 실패 후 우생학 연구에 빠져들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IQ 100 이하인 사람들은 불임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도 거침없이 뱉어냈다. 1989년 79세로 사망했을 때는 극단적 백인우월주의자라는 평판이 업적과 명성을 덮었다. 과학에만 매진했다면 그는 이렇게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인류를 반도체 세상으로 이끈 모세.’ 입력시간 : 2007/02/12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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