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리스가 5년간의 재정위기 끝에 사실상의 디폴트(채무불이행)에 빠지면서 파국을 초래한 원인에 대한 분석이 한창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어느 국가 못지않게 높은 성장세를 누리던 그리스 경제가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로 내몰리게 된 데는 혹독한 긴축의 잣대를 들이민 채권단과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무모한 정치적 도박만을 일삼은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정권 모두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이다. 하지만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Grexit)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고조된 가운데 근본적으로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지적에 또다시 힘이 실리고 있다.
# 잘못된 시작
후진적 정치에 부패 만연… 위기 키우며 경쟁력 잃어
30일(현지시간) 그리스에서 터진 문제는 그 근원을 따지자면 그리스가 오래전부터 안고 있던 문제가 지난 2001년 유로존 가입을 계기로 증폭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온정주의적(paternalistic) 정치 문화와 공공기관에 만연한 부패 등 '후진' 정치의 고질적 병폐에 시달리는 그리스가 유로존에 가입한 이래 위기의 불씨는 꾸준히 자라왔다.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 저금리로 돈을 빌려 선심성 복지를 남발했고 '공짜 점심'에 중독된 그리스 경제는 경쟁력을 잃어갔다.
애당초 경제가 낙후된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을 허용한 것부터 잘못됐다는 지적도 심심찮게 제기된다. 2013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국내 지방선거 유세장에서 "일련의 위기는 유로화 도입 단계에서의 잘못이 불거진 것"이라며 "가령 그리스의 유로존 가입을 허용하면 안 됐다"고 언급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스는 유로존 가입을 위해 과거 통계를 날조한 사실이 밝혀지는 등 처음부터 단일 통화권의 기준선을 벗어났던 국가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도 "그리스를 유로존에 포함시킨 정치집단에 잘못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잘못된 처방
1차 구제금융 지원 대가로 지출 삭감·긴축재정 결정
곪았던 그리스의 재정난은 2010년 그리스가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터졌다. EU,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 등 이른바 '트로이카'로 불리는 국제 채권단은 그리스에 대한 1차 구제금융 지원을 결정하고 그해 6월 지원의 대가로 그리스의 재정긴축과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재정계획을 타결했다.
하지만 이후 5년간 채권단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재정긴축은 그리스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오히려 '독'이 됐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독일이 주축이 된 혹독한 긴축 처방은 수요감소로 경제불황을 심화시켜 채무부담을 오히려 키웠다는 것이다. 알자지라방송은 채권단의 구제금융 정책으로 그리스 국내총생산(GDP) 중 20%가 증발하고 실업률은 25%를 넘어섰다며 채권단의 처방은 "그리스 경제를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유로존을 붕괴 위기로 내몬 그리스 국민들에게 벌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배리 아이컨그린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UC버클리) 교수도 최근 한 기고문에서 채권단의 지출 삭감 및 증세 정책이 그리스의 불황 심화시킬 것이라는 현실을 무시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잘못된 지도자
되레 수요 줄고 불황 키워 "연금 달라"
5년간의 긴축압박에 지친 그리스인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시리자 정부는 집권 5개월여 만에 그리스 경제 파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몰고왔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이끄는 시리자 정권은 개혁의 성과나 채권단을 설득할 대안은 제시하지 못한 채 '벼랑 끝' 전술로 구제금융 협상을 단절시켰다. 특히 협상 막바지에 치프라스 총리가 갑자기 꺼내 든 국민투표 카드는 최악의 정치적 도박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영국 애덤스미스연구소의 팀 워스톨 연구원은 최근 포브스지 기고를 통해 "상황을 망쳐놓는 정치인들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FT도 최근 사설을 통해 그리스 사태의 책임에서 채권단도 결백하지는 않지만 치프라스 총리가 그리스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