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11일] <1445> 영국, 이집트점령

1882년 7월11일 오전7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외항에 포진한 6,106톤짜리 영국 전함 인빈서블호의 대포가 불을 뿜었다. 목표인 해안포대가 파괴된 후에도 영국은 지중해함대 소속 전함 15척을 동원해 사흘간 포탄을 퍼부어 알렉산드리아를 초토화했다. 영국은 왜 찬란한 역사와 고대문물을 간직한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파괴했을까. 명분은 응징. 채무불이행 상태인 이집트에서 민족주의 폭동이 발생해 유럽인 50여명이 살해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보냈다. 인도로 향하는 단축로인 수에즈운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터. 최신 무기로 무장한 4만여명의 영국군은 순식간에 이집트를 삼켰다. 수에즈운하까지 도달하는 데 약간의 저항이 있었을 뿐이다. 군사적으로도 영국은 첨단기술을 도입한 새로운 전투방식을 선보였다. 이집트가 근대화 정책으로 외채를 도입해 깔아놓은 철로를 따라 진격하는 장갑열차를 운용하고 강에 부교를 설치하는 전투공병도 등장시켰다. 전신도 적극 활용해 불과 1시간 만에 현장 지휘관의 승전보고와 여왕이 축하답신이 전보로 오갔다. 오스만튀르크의 지방정권으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던 이집트는 이때부터 사실상의 식민지로 주저앉았다. 반면 수에즈운하의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한 영국은 괴뢰정부를 내세워 이집트의 경제구조를 구미에 맞게 고쳤다. 영국 면직공장을 위해 원료공급지 확보 차원에서 이집트 전역에는 면화농장이 들어섰다. 영국 제국주의 정책의 핵심인 3C(카이로-케이프타운-캘커타) 라인도 이때 만들어졌다. 영국의 이집트 침공은 유럽 열강을 자극해 아프리카 대륙 분할을 낳고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영국이 수에즈운하에서 완전히 떠난 시기는 1956년. 어설픈 세계화와 외채가 외세의 간섭과 침략ㆍ수탈을 부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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