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몽금포작전


1949년 8월10일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군사고문단장 윌리엄 로버트 준장의 전용 보트가 사라졌다. 로버트 준장은 미 국방성에서 보내준 이 보트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자랑했고 낚시를 좋아하던 이 대통령은 이 보트를 타보고 싶어 했다. 해군은 정부 수립 1주년을 맞아 열릴 예정이던 최초의 관함식을 코앞에 두고 벌어진 이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조사해보니 범인은 해군 인천 경비부 소속 하사관이었다. 보트 정장으로 임명된 그가 하필 짝사랑한 여인은 남로당 공작원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보트를 몰고 월북하면 여동생과 결혼시켜주겠다"는 말에 속아 일을 저질렀다.


당시 군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해군 내 좌익분자가 함정을 몰고 월북하는 경우가 많았고 육군에서는 대대 병력 전체가 북으로 가는 일도 있었다. 더는 좌시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군은 몽금포항에 가 보트를 찾아오기로 하고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해 8월16일 새벽6시 먼동이 튼 직후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20여명의 정보대원이 6척의 보트에 나눠 타고 기습을 감행했다. 적 총탄에 함 소령이 허벅지 관통상을 입었지만 엄호하던 공정식 소령 등이 중기관총을 쏘며 반격에 나서 적 경비정 4척을 침몰시키고 1척을 나포해 돌아오는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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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몽금포작전은 지금은 '우리 군 최초의 대북 응징 보복 작전'이지만 당시에는 존 무초 주한 미 대사의 규정처럼 '한국군의 불법적인 38선 월경 사건'이었다. 몽금포작전은 이후 6·25전쟁이 북침 전쟁이라는 주장의 근거로까지 이용되면서 더욱 드러내서는 안 될 일로 치부됐다가 1990년대 초 진실이 밝혀진 후 비로소 재평가 작업이 시작됐다.

해군은 15일 인천 월미공원에서 몽금포작전을 기리는 전승비 제막식을 연다. 정부는 앞서 8일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함명수 전 해군 참모총장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는 등 7명을 포상했다. 국가가 노병을 잊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데 66년이 걸렸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한기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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