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가서 본 금강산] 분단의 한 삭이듯 황홀한 자태

18일 오후 5시45분. 1,475명을 태운 배는 폭풍주의보가 내려진 바다를 헤쳐나갔다. 폭풍주의보는 어떤 신의 계시일까. 흐린 바다 위로 처음 느끼는 긴장감이 어둠처럼 짙어진다. 바람은 어둠보다 더 짙게 다가와 뱃전에 부딪친다.얼마나 지났을까. 배는 지도에만 나와 있는 선을 넘었다. 군사분계선이다. 갈매기 네댓 마리가 잠 못 이루는 배를 따라온다. 저 놈들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따라오는 것일까. 배는 캄캄한 어둠을 향해 달린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일까. 민족의 생살을 찢은 지도 벌써 53년의 세월이 지났다. 시속 18노트의 배로 11시간이 걸리는 거리, 그것도 곧장 가면 5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건너는 데 53년이 더 걸렸다. 배는 아득한 기억을 거슬러 타임머신처럼 과거로 달린다. 어스름한 꿈인지 가물가물한 새벽인지 모르게 장전항에 들어섰다. 『오마니이~.』 새벽을 통곡하는 울음소리. 바람찬 갑판에서 들린다. 장전항을 보자마자 울어버린 실향민이다. 70줄이 넘은 할머니 같다. 고향이 바로 여기라는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어둠을 헤쳐 희미한 언덕을 가리키며 두 눈에 흐르는 세월을 닦아낸다. 웅성웅성 승객들이 모였다. 『아즈바이, 시집가는 새색시처럼 두근거려서 한잠도 못잤시오.』『가는 게 즐거우면 안 잔디 무슨 상관 있관디?』 80대 숙부와 60대 조카딸은 평안도 사투리로 설레는 공기를 호흡한다. 잔물결을 타고 배도 덩달아 설렌다. 정말 새색시 볼처럼 발갛게 동이 튼다.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나즈막한 항구에 첫날밤을 지낸 새색시의 부끄러움이 포시시 번진다. 우리는 정말 과거에 도착한 것일까. 먹는 둥 마는 둥 허둥대는 아침에 옆에 앉은 이향지 시인이 말했다. 『우리는 오늘 갑자기 금강산이 고향이 된 사람들이지요』. 그렇다. 우리는 지금 고향에 도착했다. 배는 시끄러운데 항구는 고요하다. 설렘과 두려움으로 내려딛은 현실은 다진 모래흙과 함께 발에 밟힌다. 무채색 풍경 속에 자주빛 지붕을 이고 있는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보인다. 현대측은 이 건물을 하루 만에 지었는데 우리는 통과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린다. 닦은 지 한달 남짓한 도로가 철조망을 끼고 달린다. 숲속에 띄엄띄엄 인형처럼 서 있는 군인들. 늦가을 시골풍경 속에 섞여 있다. 10대 초반의 앳된 얼굴과 붉은 견장만 눈에 들어온다. 이 넓은 풍경 속에서 「윌리를 찾아라」는 게임이나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멀리 나타나는 매봉(鷹峰). 등성이에 막 내려앉은 듯한 매바위가 수문장처럼 매섭게 쏘아본다. 잠시 잊었던 추위가 싸늘하게 기억난다. 설악산 설악동 같은 금강산 온정리(溫井里). 온천 때문인지 온정(溫情) 때문인지 포근하다. 「금강산 려관」과 금강원(식당)에서 마주친 북한 안내원의 모습도 정겹다. 아침 햇살을 받으면 수정처럼 빛나는 수정봉(水晶峰)은 반짝이는 장식이 별처럼 수없이 달린 암갈색 외투를 입은 귀부인 같다. 남편은 키가 작고 뚱뚱한 대머리 아저씨, 수정봉 오른쪽 어깨 너머 보이는 바리봉(鉢峰)이다. 찬 안개 끼는 한하계(寒霞溪)는 중생이 불법(佛法)에 귀의하는 길일까. 관음보살·세지보살·문수보살이 현몽(現夢)한 듯 왼쪽에 관음연봉(觀音連峰), 오른쪽에 세지봉(勢至峰)과 문수봉(文殊峰)이 잇달아 나타나 속세를 잊으라 다그친다. 온정천(溫井川)은 한하계를 따라 만상계(萬相溪)로 쉽게 오르는데 온정령(溫井嶺)은 만상정(萬相亭)까지 뱀처럼 구불구불 기어간다. 속세를 벗어나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 온정령 백여섯 구비를 돌고 돌면서 구비마다 번뇌를 하나씩 벗어던져도 백팔번뇌에서 두가지 번뇌가 남는다. 가파른 돌계단을 정성스레 디뎌 정성대(頂成臺)에 오르면 삼선암(三仙巖)이 나란히 얼굴을 내민다. 장기(將棋)를 두던 세 신선은 생긴 모습대로 제각기 예리하고, 무던하며, 두터운 행마(行馬)를 구사했을 것이다. 훈수를 하다 건너편으로 쫓겨난 독선암(獨仙巖)은 역시 오만한 독불장군처럼 서 있다. 멀리 만물상(萬物相)을 흘낏 보고 돌계단으로 가는데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갑자기 돌아서는 섬뜩한 귀신의 얼굴! 귀면봉(鬼面峰)이다. 미처 다 떨쳐버리지 못한 번뇌를 꾸짖는 것일까. 내려가는 돌계단이 아찔하다. 선녀들은 천선대(天仙臺)로 쉽게 내려오는데 인간은 천선대에서 오르기를 멈춘다. 선녀를 잃은 나뭇꾼은 하늘로 오르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도끼로 바위를 내리찍었다. 도끼자국이 선명한 절부암(折斧巖)을 보며 매정한 선녀를 원망한다. 그러나 천선대에 우뚝 서면 매정한 선녀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찌 여기서 세속을 논할 수 있을까. 만물상은 웅장한 창세기의 파노라마다. 단군(檀君)의 아버지(환웅·桓雄)의 아버지(환인·桓人)는 여기서 세상을 창조했을 것이다. 만물(萬物)은 여기서 돌이 되어 창세기의 모습 그대로 조물주를 찬양하고 있다. 어어, 나도 여기서 이대로 돌이 되는 것일까. 【금강산=허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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