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컬처프론티어]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 주연 배우 김성녀

"한없이 희생하는 엄마… 그 모습 생각하며 많이 울기도 했죠" <br>국극 스타 어머니 따라 5세때 아역배우로 데뷔 50년 넘게 무대인생 걸어<br>새로운 시대감성에 맞게 마당놀이 키우기 위해 후배에 주역 물려주기도<br>연기자로서 요즘 소망은 90세까지 공연하는 것


한국 전쟁 직후인 1955년. 다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당시 여성국극(여성들로 구성된 대중적 창극단) 스타였던 어머니 박옥진(2004년 작고) 여사의 손을 잡고 유랑극단의 천막극장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천막극장에서 소꿉놀이 대신 연기 놀이를 하던 여자 아이는 그 해 아역 배우로 데뷔했다. 무대는 아이에게 놀이터였고 인생의 씨를 뿌리는 텃밭이었다. 여자 아이는 그로부터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대 특유의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삶을 꾸려가고 있다. 주인공은 바로 마당놀이, 연극, 뮤지컬 등 장르를 넘나드는 연기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김성녀(61ㆍ사진) 중앙대 국악대학장 겸 극단 미추 대표다. 김 교수가 요즘 연기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무대는 뮤지컬 '엄마를 부탁해'다. 충무아트홀에서 6월19일까지 공연하는 '엄마를 부탁해'에서 그는 엄마 역을 맡았다. 이번 연기를 하면서 그는 자식에게 한없이 자애로우면서 희생적인 극 중 엄마와 지난 2004년 돌아가신 모친의 모습이 자주 겹쳐진다. "어렸을 때 예인(藝人)으로서 엄마는 당대 최고의 스타였으니 사람들은 화려한 모습으로 생각하겠지만 내 기억 속의 엄마는 다른 배우들처럼 매니큐어를 칠하거나 명품으로 치장하지 않은 검소한 모습이었어요." 연출가였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족의 생계와 자식들의 교육을 책임져야 했던 김 교수의 어머니는 공연할 때 야식비를 받으면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서 학비에 보태셨다고 한다.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한 어머니는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늑막염에 결핵까지 걸려서 쓰러지셨고 돌아가실 땐 간암으로 고생하셨다고 한다. 자신과 가장 많이 닮은 큰 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김 교수에게 자주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에게 나라는 존재는 딸이자 동지이자 남편이었어요. 가장 믿고 의지하는 존재이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저를 가장 어려워하셨지요." 7년 전 세상을 떠난 엄마가 아직 살아계시다면 그는 무엇을 가장 해 드리고 싶을까. "항상 바쁘게 살아온 탓에 돌아가실 때도 막내 동생이 엄마를 모셨어요. 살아계시면 생전에 당신이 해 주신 것처럼 하루 세끼 따뜻한 밥상 차려 드리고 포근한 이불에서 주무시게 하고 예쁜 옷도 입혀드리고 싶어요. " 소박하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을 말하는 그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가 쓰러지면서 6남매의 장녀인 김 교수는 소녀 가장이 됐다. 대학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든 그는 1970년대 초에는 동생과 함께 '비둘기 자매'라는 이름으로 가수로 나서 '까투리 사냥'을 히트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무대의 매캐한 냄새를 잊지 못한 그는 1973년 극단 민예극장에 입단했고 1978년에는 국립창극단에 들어갔다. "1970년대에 제가 받은 월급이 20만원이었어요. 가난을 각오하긴 했지만 궁핍한 삶은 험했지요. 다행히 그때의 고생이 나를 강하게 만드는 회초리가 됐고 제가 지금까지 무대에 설 수 있는 자양분이 된 것 같아요." 극단 민예극장에 들어갔을 당시 정식 배우로 데뷔하게 해준 사람이 젊은 연출가 손진책(현 국립극단 대표)이다. 손진책이 연출한 '한네의 승천'에서 주인공을 맡은 김 교수는 그 때만 해도 그 연출가와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한량인 탓에 엄마가 한 평생 마음 고생을 하셔서 전 독신으로 살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고 연극밖에 모르던 손 대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함께 지내다 보니 그 사람의 진면목이 보이더군요. 제 아버지와는 반대로 무뚝뚝하고 만나면 작품 얘기만 하는 진지함 그 자체였어요. 이 사람이면 함께 삶을 꾸려도 되겠다는 믿음이 생겨 결혼하게 됐지요." 김성녀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대표 연관어는 '마당놀이'다. 김 교수는 윤문식(68), 김종엽(64)과 함께 '마당놀이 인간문화재'라고 불린다. 1981년 초연작 허생전을 비롯해 별주부전, 홍길동전, 춘향전, 이춘풍전, 봉이 김선달전 등 한국의 전설이란 전설은 대부분 이들의 구성진 가락과 흥겨운 몸놀림을 통해 '마당놀이'란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3,000회가 넘는 공연 동안 매년 10만 명 이상의 관객이 함께 울고 웃었다. 지난해 말 마당놀이 30주년 기념 공연을 끝으로 후배들한테 물려주기로 했다는 김 교수는 "1세대가 마당놀이의 기틀을 충분히 잡고 한국 공연의 정체성을 확보했으니 새로운 세대가 21세기에 맞는 새 버전의 마당놀이로 키워야 할 때입니다. 좋은 작품들이 망하는 이유를 들여다 보면 기존 세대가 욕심 내면서 연연하기 때문이거든요. 손 대표와 나의 자식 같은 작품이라 애착이 남다르지만 젊은 후배들이 시대 감성에 맞게 잘 다듬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어머니가 쓰러지는 바람에 제때 대학을 못 갔지만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장이 되기까지 그는 억척스럽게 공부했다.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은 후 35세에 늦깎이 대학생이 된 그는 45세에 대학원을 마치면서 10년을 자신에게 투자했다. "남편은 항상 저에게 재능은 충분하니까 지적인 배우가 됐으면 한다며 동기 부여를 해주었지요. 한창 때는 학교 다니면서 연기 활동하고 애들 키우면서 하루를 25시간처럼 살았는데 그때 고생한 덕에 엄마가 그렇게도 원하던 학교 선생님(대학 교수)도 되고 가정도 원만하고 애들도 잘 컸으니 지나온 삶이 고맙기만 합니다." 요즘 김 교수는 연기자로서 새로운 소망이 하나 생겼다. 지난 2005년 첫 무대에 올려 '1인 32역'으로 호평을 받은 '벽속의 요정'을 90세까지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작품은 전쟁 때문에 40년간 벽 속에 숨어살며 딸의 성장을 지켜보는 아버지, 벽 속에 사는 요정이 숨진 줄 알았던 아버지라는 점을 깨달아가는 딸의 모습을 통해 가슴 뭉클한 가족애를 그렸다. 초연 이후 매년 한 차례씩 정기 공연을 하고 있는 그는 5살 딸부터 아버지, 어머니, 경찰 등으로 변신한다. "올 가을로 벌써 7년째예요. 처음엔 10주년까지만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지난 해 공연부터 70세까지 해보면 어떠냐는 주변의 제안이 있었어요. 당시엔 거절했는데 얼마 전 장민호(87)ㆍ백성희(86) 선배의 연극 '3월의 눈'을 보고 나니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나도 저분들처럼 80세를 넘어 90세까지 이 작품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환갑을 넘기고도 5세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배우 김성녀. 그의 90세 무대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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