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2일] 헨리 허드슨


도무지 길이 없었다. 동양의 보물을 얻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인도 항로는 이미 포르투갈이 독식한 상태. 영국의 속이 탔다. 1577년 해적 출신의 영국 군인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세계를 일주하고 1588년에는 스페인 무적함대(아르마다)를 물리쳤어도 대서양은 여전히 스페인의 바다였다. 동양과 통상을 꾀했던 이유는 인도ㆍ중국 무역을 독점한 포르투갈이 향신료와 도자기 수입 판매로 부를 축적하고 스페인이 신대륙의 금으로 번성했기 때문. 아시아 교역로나 식민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영원히 도태된다는 위기감에서 바다로 나섰다. 스페인 함대를 피하려던 영국의 선택은 신항로 개척. 대서양 북쪽 바다를 나아가면 아시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배를 띄웠다. 결과는 실패. 험한 파도와 유빙에 막혔다.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은 달랐다. 1570년 9월12일 선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바다와 친숙해진 그는 두 차례 북극항해에서도 살아 돌아온 유일한 선장이었다. 북위 78도선까지 올라간 적도 있다. 최대 업적은 3차 항해.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은 항해에서 맞바람과 유빙을 만나자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린 덕분에 허드슨강을 발견해냈다. 태평양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여기고 큰 강의 240㎞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다 물자부족으로 포기했지만 이 탐험은 네덜란드의 뉴욕 식민지 건설을 낳았다.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키를 잡았던 4차 항해에서 발견한 허드슨만과 제임스만에는 영국인들이 몰려들어 캐나다 식민지를 세웠다. 항해 막바지에 선상반란이 일어나 허드슨은 아들을 포함한 선원 8명과 함께 작은 보트로 얼음바다 위에 내려져 행방불명됐지만 그가 발견한 북미 동부지역,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에는 풍요가 넘쳐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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