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동십자각/12월 28일] 조선업계 '기자재 바꿔치기'

부산 지역에 소재한 중견 조선업체인 A사는 최근 그리스 선주사로부터 심각한 컴플레인을 제기 당했다. A사가 선주사 측이 지정한 기자재업체를 탈락시킨 뒤 자신들 입맛에 맞는 업체의 제품을 사용하려다 뒤늦게 선주사에 적발된 것이다. 그리스 선주사의 반발로 당초 탈락된 업체 제품이 선박건조에 적용되기는 했지만 A사는 해외 조선시장의 신용도에 큰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세계 해운업계를 좌지우지하는 큰 손이 그리스 선주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막을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니 A사의 '기자재 바꿔치기'는 현재 국내 조선업계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로 비칠 만큼 뒷맛이 씁쓸했다. 그리스 선주사는 A사에 대형 선박을 발주하면서 선박용 정화조에 국내 I사의 제품을 사용하도록 옵션을 지정했다. I사는 세계 선박용 정화조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으며 국내서는 처음으로 오는 2010년부터 적용될 국제해사기구의 강화된 배출허용 기준을 획득한 기업이다. A사는 그러나 그리스 선주사 측과 협의도 없이 제3의 업체와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A사는 이 과정에서 I사가 가진 스펙(SPEC)은 깡그리 무시했다. 제품력과 기술력보다는 납품 로비에서 밀린 탓이다. 선주사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강력하게 항의를 했음은 물론이다. 한 조선 기자재업체의 관계자는 "상당수의 중소형 조선업체들에서 이 같은 일들은 비일비재하다"고 말했다. 한때 조선업 호황 속에 조선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다 보니 과당 경쟁은 물론이고 적당히 로비에 밀린 기자재업체 선정 등이 다반사라는 이야기다. 이는 선박의 품질 저하뿐만 아니라 선주사에 대한 신뢰까지도 무너트리는 '제 발등 찍기'가 아닐 수 없다. 최근 국내 조선업계는 세계 4위권 안에 드는 초대형 조선소를 제외하고 대부분 감원의 회오리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실제 부산에 본사는 둔 H사는 대형 조선업체로는 처음으로 희망퇴직제를 실시한다. 회사 측은 최근 조선부문 직원 2,500여명 모두에게 희망퇴직을 받겠다는 통지서를 보냈다. 중소 조선소들은 상황이 더 좋지 않다. 최근 워크아웃을 신청한 SLS조선이나 채권금융기관 공동관리를 신청한 ㈜21세기조선, 워크아웃 과정을 밟고 있는 대한조선, 세코중공업 등의 인원 감축 압박은 대형 조선소보다 더 클 수밖에 없을 만큼 심각하다.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중소 조선업계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력 구조조정을 통한 자구책 마련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의 신뢰회복부터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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