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한국프레스센터. 우리 사회의 '유리천장'을 깬 각 분야 여성인재 1호들이 경험을 나누고 필요한 정책을 제안하는 '여성 1호 간담회(여성가족부 주관)'가 열렸다. 권선주 IBK기업은행장, 김영란 서강대 석좌교수 등 경제·법조계에서 활약하는 여성 고위직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곳에 예술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휘자 성시연(38·사진)씨도 함께 했다. '글라스 포디엄(glass podium)'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군대의 장성, 종교의 사제만큼이나 여성에게 배타적인 것이 여성 상임지휘자 자리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두드리면 깨지는 것이 유리의 속성이다. 지휘자 성시연은 끊임없이 열정을 쏟아 여성·동양인이라는 한계를 딛고 137년 전통의 미국 보스턴심포니에서 첫 여성 부지휘자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지난 1월부터는 예술단장 겸 상임지휘자로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됐다. 국내 국공립 오케스트라 36곳 중 최초의 여성 상임지휘자다. 전세계적으로도 여성 상임지휘자의 활약은 미국 볼티모어교향악단의 마린 알솝, 카타르 국립교향악단의 장한나 등 손꼽을 정도다. 성시연의 임명이 남다르고 임기 2년 동안 그가 펼쳐 보일 일들에 관심이 더 쏠리는 이유다. 11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구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성시연 예술단장과 만나 그가 '금녀의 벽'을 부수기 위해 지나온 시간, 경기필과 앞으로의 청사진에 대해 들어봤다.
◇막연한 상상이 현실이 된 짜릿한 순간=성 단장이 음악과 만나게 된 계기는 '피아노'다. 다섯살 때부터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고 피아노 전공으로 취리히음대에 입학하며 유럽 유학길에 오른다.
"어머니가 본래 성악 전공을 꿈꿨지만 집안형편상 접으셨어요. 꼭 성악이 아니더라도 본인이 못다 이룬 꿈을 딸이 이뤄주기를 내심 바라신 것 같습니다. 평범한 살림이었지만 제가 음악 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지원은 늘 아낌없으셨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그랜드피아노를 사주셨고 (피아노) 레슨도 교수님께 직접 받았죠. 당시 피아니스트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멋진 직업이라 생각하는 딸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시지 않았습니다."
성 단장은 첫 유학지로 선택한 스위스 취리히가 본인의 색깔과 잘 맞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많은 이들이 살고 싶어하는 곳이지만 깨끗하고 정형화된 취리히의 색깔이 그와는 잘 융화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고민에 휩싸일 무렵 문득 독일 베를린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지나고 보면 아귀가 딱 들어맞은 것 같아요. 초등학교 때 '피아노음악'이라는 잡지에서 전세계 음악 명문대 10개 학교를 시리즈로 소개하는 기사를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어린 마음에 사진 속에 담긴 베를린 국립음대의 고풍스러운 외관이 시선을 사로잡았고 훗날 꼭 이 학교에 가겠다고 점 찍어뒀죠. 막연히 머릿속에 그렸던 상상이 현실이 돼 그 학교에 발을 처음 내디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묘한 기분이 듭니다."
2001년 그의 나이 스물다섯, 인생의 터닝포인트(전환점)가 찾아왔다. 피아노를 공부하면서 불현듯 한계점에 다다른 느낌이었고 때마침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독일 지휘자)의 공연실황 지휘 영상이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 "지휘자 한 사람이 100여명 남짓한 연주자들의 장단점 등 모든 것을 끌어내 혼연일체의 한 음악으로 만드는 모습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이끌림이 있었죠."
호불호가 명확하고 선택할 때만큼은 더없이 명료한 성 단장은 그 길로 베를린 한스아이슬러음대 지휘과에 입학해 지휘자로서 새 삶을 펼쳐 보이기 시작한다. 베를린 유학기간에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자본 적이 없을 정도로 조금 늦게 새 길에 들어선 자신에게 무척이나 가혹하고 엄격했다.
"하루 동안 제대로 된 연습을 하지 않으면 내 앞길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두려움이 늘 있었죠. 물론 파티도 두루 참석하고 싶고 소소한 일상을 누리고 싶은 마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실을 보기 위해 내가 희생해야 할 부분을 정하고 과감히 버리는 연습이 필요했죠. 그 목록을 정하는 게 가장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 그 쓰디쓴 시간은 달디단 열매로 돌아왔다. 졸링엔 여성 지휘자 콩쿠르 1위, 게오르그 솔티콩쿠르 1위, 말러 국제지휘 콩쿠르 1위 없는 2위 등 각종 세계 콩쿠르 무대에서 활약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여성 지휘자만의 강점을 꼽아달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금녀의 벽'을 허물었다는 이슈로 잠깐 조명받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다 똑같습니다. 남자냐 여자냐를 떠나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서 100명 이상 되는 관객들의 날카로운 비평 앞에 오롯이 서게 되는 거죠."
성시연은 편견과 한계를 딛고 137년 전통의 미국 보스턴심포니에서 첫 여성 부지휘자로 활약했고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는 서울시향 부지휘자로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다. 그의 지휘를 뭇사람들은 '따뜻한 카리스마'로 표현한다. 힘 있게 지휘봉을 저으며 음악에 흠뻑 녹아든 그를 보면 가만히 앉아 감상에 몰입하는 관객도 덩달아 땀을 쏟아내며 함께 젖어드는 느낌이다. 성 단장이 말하는 지휘의 매력은 무엇일까.
"지휘는 음악을해석하고 생각한 바가 몸을 통해 나오는 것입니다. 테크닉보다 정신적인 것(spiritual)의 총합이라 볼 수 있죠. 100여명의 연주자가 풀어내는 제각각의 음악적 해석이 지휘봉 끝에서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하나가 될 때가 있습니다. 음악 속에 너무 빠져들어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무아지경에 이르게 되는 짜릿한 그 순간, 그게 바로 제가 지휘봉을 잡는 이유입니다."
◇ 젊은 패기·열린 마음이 공통분모=지난해 6월 불미스러운 일로 사임한 구자범 전 예술단장 이후 경기필은 반년 동안 수장 없이 침체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국내 최초 도립오케스트라로 창단돼 1997년 이후 꾸준히 명맥을 이어온 경기필의 재도약을 위한 구름판이 필요했다. 경기도문화의전당은 1월 30대 젊은 음악가 성시연에게 이 과업을 맡겼다. 반년째 공석이던 지휘자 자리에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젊은 지휘자가 선임됐다는 소식에 단원들도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성 단장은 취임이 결정되자마자 단원들과의 개인면담에 들어갔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 소재는 실력에 비례하는 '좋은 근무조건'이었다. "여러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조금 마음을 찌릿하게 했던 것은 좀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좋은 음악을 연주했으면 한다는 의견이었죠. 제도적인 부분은 당장 가시화하기에 이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상임지휘자의 소관으로 가장 빨리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제가 내성적인 부분이 다분한데 이런 것들을 뒤로하고 우선 스스로를 무리 속으로 던져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성 단장은 경기필의 가능성을 (단원들의) '열린 마음'에서 찾았다. 누구보다 변화를 갈망하는 단원들의 바람과 단장의 열정이 잘 융화되는 게 관건이다. 성 단장은 경기필의 '부활'을 위해 몇 가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나는 운영위원회 후원 조직이다. 오는 27일 예술의전당에서 있을 취임 첫 공연을 완벽하게 치러내 개인과 단체 등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후원을 이끌어낸다는 구상이다. 다른 하나는 '음악적 레퍼토리의 확장'이다. 헝가리 민속음악을 현대음악으로 승화시킨 작곡가 벨라 바로트크의 음악을 6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릴 정기공연 때 국내 초연하는 등 새로운 곡들을 경기필의 연주로 많이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나라 밖에서의 활약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제가 서울시향에 (부지휘자로) 있을 때를 돌이켜보면 매년 해외투어 이후 악단의 실력이 급상승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해외투어 연주의 꿈은 늘 품고 있습니다. 좀 더 욕심을 부리면 당당히 실력을 인정받아 초청돼 해외무대에 서고 싶습니다."
취임 후 첫 공식 무대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경기필' 재도약 알릴 것
이번 공연에서는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선보인다. 성 단장은 "구스타프 말러(1860∼1911)가 '나는 누구인가' '과연 작곡가로서 존속할 수 있느냐' 등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던 삶의 전반적인 고뇌를 담아 표현한 곡"이라며 "이는 경기필의 재도약, '부활'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고 풀이했다. 미완성 교향곡 10번을 포함해 말러가 남긴 총 11곡의 교향곡 중 '2번 부활'은 그가 6년에 걸쳐 한 영웅의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거대한 드라마로 말러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연주자·지휘자 입장에서 '2번 부활'뿐 아니라 말러의 교향곡은 전부 장대한 곡 규모와 해석의 난해함으로 늘 높은 역량을 요구하는 '도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성 단장은 이미 2007년 독일 밤베르크에서 열린 말러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고 2011년에는 말러 교향곡 중 해석이 가장 어렵다고 정평이 난 말러 교향곡 7번을 서울시향과 함께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래서 이번 무대는 기대감이 더욱 크다. 이번 공연에서는 국립합창단과 서울시합창단 100여명, 소프라노 이명주, 메조소프라노 김선정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2만∼4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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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