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고대 의대 성추행 사건'의 항소심 선고가 나온 지난 3일 서울고법 형사법정, 판사는 판결문을 읽으며 위로의 말을 덧붙였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서릿발 같은 판결문에 따뜻한 위로가 더해지자 법정의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성범죄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가 반영돼 있었다. "피해학생이 술에 취해 반항 불가능한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러 죄질이 무겁지만 술을 마시다가 '우발적으로 발생한 범행'이며 전과가 없었다는 점을 착안했다"고 적시한 것이다.
6년간 동고동락해온 의과대학 동기들이 성범죄에 휘말려 한 쪽은 징역 선고를 받은 범죄자로, 다른 한 쪽은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은 피해자로 엇갈리게 된 게 가해 남학생들의 '우발적인 잘못'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나는 꼼수다(나꼼수) 비키니' 논란이 커지자 나꼼수 진행자들은 "성희롱을 할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수감된 정봉주 전 의원에게 비키니 사진을 보내 '위로'하라는 말이 성희롱이 되려면 "성 권력의 불평등 관계가 전제돼야 하며 해당 여성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어야 한다"고 반박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발단이 된 나꼼수 방송분에는 "정 전 의원이 성욕 감퇴제를 먹고 있으니 비키니 사진을 보내 위로해도 좋다"는 민망한 멘트가 분명히 포함돼 있었다.
누가 봐도 거친 언사도 마다하지 않는 남자 진행자들의 음담패설에 가까운 것이다. 비키니 사진을 보낸 여성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든 아니든,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튀어나온 부주의한 언사가 문제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고대 의대 사건 가해자를 향한 판사의 위로와 나꼼수 비키니 사건은 다른 듯 닮았다. 둘 사이에는 '남성' '권력' 같은 단어가 교집합으로 묶여 있다. 무엇보다 이런 단어에 대해 남성들이 무감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범죄를 단죄하는 법관이 가해자의 '우발적 잘못'을 위로하고 인기와 영향력을 얻은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가 마초적인 발언을 하고도 그게 마초적인지 모르는 상황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되면 "성추행 피해 학생의 2차 피해가 커서 가해학생의 실형이 불가피하다"는 법원의 판결이나 "여성도 몸을 이용해 정치적 표현을 할 수 있다"는 나꼼수 진행자의 발언은 빛이 바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