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빙 접전… 막판 패로 대승부/초중반 고바야시 세력작전 두각/조9단 후반 맹추격 전세뒤집어조훈현9단이 3년만에 다시 세계바둑 정상에 올라섰다. 조9단은 18일 열린 제8기 동양증권배 세계바둑 선수권대회 결승3국에서 고바야시 사토루9단과 치열한 접전끝에 2백85수만에 흑불계승, 종합전적 3연승으로 패권을 안았다. 손에 땀을 쥐는 대국상황을 지켜본 본보 양평 편집위원의 관전기를 싣는다.<편집자주>
아래에 눌린 씨름꾼이 모래판에 머리털이 스치는 순간 뒤집은듯한 대국이었다.양쪽 다 1분 초읽기에 몰린 5시간58분의 대국에서 조훈현9단은 5시간50분 동안 밑에 깔려 있었고 8분동안은 고바야시9단과 나란히 쓰러지고 있었다.그가 고바야시9단을 누르고 있는 장면은 볼수 없었다. 구경꾼들은 모래판위에 누워있는 고바야시9단과 그위에 포개져 있는 조9단을 보았을 뿐이었다.
막판에 몰린 대국답지 않게 두기사의 초반 손길은 빨랐다.카메라맨들의 플래시 소리가 잠잠해졌을 때는 이미 반면에 광장은 남아있지 않았다.특히 조9단의 손길이 빨랐고 그 속도에 말려들었는지 고바야시9단도 막판이라는 처지를 잊은듯 했다.
양쪽은 진검승부라기 보다는 도장에서 연습하듯 공식화된 목검휘두르기를 주고 받았다.우하귀에 조9단이 40집 안팎의 블랙하우스를 짓는 동안 고바야시9단이 그 주위에 하얀 장성을 쌓은 것도 낯익은 것으로 검토실 기사들의 손길을 따라 두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것은 겉모양일뿐이었다. 양쪽은 두차례의 대국경험을 살려 조9단은 실리를,고바야시9단은 「물찬 제비」를 놓치지않고 잡아챌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나무 부딪치는 소리만 나던 반면에 처음 쇳소리가 난 것은 우상귀에 백54가 놓였을 때.낟알처럼 떠있는 흑 17 한점을 건드렸을뿐이나 조9단이 처음으로 오랫동안 판위에 고개를 박은채 손놀림을 잊기 시작했다.그것은 하얀 장성이 힘을 쓰기 시작한 것이자 「물찬 제비」가 날개를 거두고 파행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흑은 63까지 그런대로 수습했지만 그것은 「수습의 조훈현」이라는 이름값에는 미치지 못해 백에 또 다른 세력을 주었다. 그 후 흑은 두터운 백의 세력에 이리저리 몸을 부딪쳐야 했고 검토실에서는 『덤을 내기 어렵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백이 좌중앙에 1백26으로 큰집을 짓고 꽃놀이패까지 남기자 그 소리는 『반면으로도 모자란다』 『고바야시가 질래야 질수가 없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앞서의 대국들이 그랬듯 조9단은 『후반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외면한채 쫓아갔고 속기에 서투른 고바야시9단이 덤 안팎의 리드를 지키기에는 판이 아직 어지러웠다.
막판 역전승같이 끝난 바둑이었지만 막상 이렇다할 럭키펀치도 없었던 것이 이날 대국이었다.초읽기에 몰린 조9단이 초읽기에 쫓긴 고바야시9단을 계속 몰아치자 검토실에서는 『반집승부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으나 그 소리는 오래 가지않았다.흑이 2백85로 패를 따낼때까지도 검토실기사들은 반집을 따지며 화면을 지켜보았고 거기엔 돌을 들지않은 고바야시의 손가락이 반면 이곳저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국장 주변 이모저모/중반이후 한때 “조9단 승리힘들다” 긴장/“세계최고 기전 보자” 해설장 등 초만원
○…조훈현9단은 역시 끈질긴 승부사였다. 조9단의 투혼이 다시한번 세계무대를 빛낸 한판이었다.
「국제전의 사나이」조9단이 또다시 기사회생의 화려한 대역전승을 펼쳐 승부를 3연승으로 마무리지으며 두번째로 동양증권배를 안았다.
서울경제신문·바둑텔레비전(BTV) 공동주최, 동양그룹 후원, 한국기원 주관의 제8기 동양증권배세계바둑선수권대회 결승5번기 제3국은 18일 상오 10시부터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1층 BTV 스튜디오에서 벌어져 조훈현9단이 일본의 고바야시 사토루(소림각)9단에게 2백85수만에 흑불계승을 거뒀다.
이날 대국은 상오 10시정각 입회인 장두진6단의 대국개시선언으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접전에 돌입.
○…대국은 집흑의 조 9단이 우상위 화점에 첫수를 놓음으로서 시작. 지난 3월31일 제1국에서 돌을 가린 결과 흑이 나왔던 조 9단이 지난 2일 제2국에서는 백을 잡았고 순서에 따라 이날은 흑번이 된 것.
○10분도 못돼 20여수
고바야시 9단도 노타임으로 좌상귀 화점에 응수하였고, 이후 불과 10분도 못되어 20여수가 진행되는 속기전 양상을 보였다.
○…이날 제3국때도 검토실과 공개해설장은 만원을 이뤄 동양증권배대회가 세계 최고권위와 전통의 기전임을 다시한번 입증.
한국기원 2층 예선대국장에 마련된 검토실에는 대국개시 직후부터 한·일 양국 기원직원, 프로기사, 취재진이 4대의 모니터를 통해 대국진행상황을 지켜보며 검토에 열중. 얼른 눈에 띄는 사람만해도 김인9단·윤기현9단·서봉수9단·이창호9단·유창혁9단·최규병8단·정동식5단·차민수4단·최명훈5단·윤영선초단등. 또 바둑사연구가 안령이씨, 조훈현9단의 부인 정미화씨와 주한일본대사관 재무참사관 야마자키 조이치(산기양일)·야마자키 후미코(산기사자)씨 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후미코에 아마5단증
○…검토실에서 갑자기 박수소리가 울려 프로기사와 취재진의 이목을 집중. 이는 바둑발전을 위해 공로가 큰 야마자키 후미코씨에게 한국기원에서 아마5단 인허증을 수여한 것. 후미코씨는 동부이촌동 신동아아파트 자택에서 주1회 10여명의 어린이에게 바둑지도를 해오고있다고 현재현이사장을 대신해 인허장을 수여한 윤기현9단이 전언.
○…한편 한국기원은 이날 하오 2시부터 2층 일반인 대회장에서 김동만 6단이 진행하는 무료공개 해설회를 개최, 2백여명의 열성 바둑애호가들을 즐겁게 했다.
○시간벌기작전 해석
○…초반 두 대국자가 거의 숨돌릴 새도 없이 미리 약속이나 한 듯 발빠른 행마로 포석단계를 끝내자 검토실의 프로기사와 바둑평론가들 사이에선 「시간 벌기 작전」이라고 이구동성. 이는 속기전 경험이 적은 고바야시 9단이 지난 1, 2국 모두 초읽기에 몰려 수읽기에 실패한 점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후반 불사조 투혼
○…이날 대국에서 가장 큰 고비는 중반 이후 벌어진 좌변전투. 조9단의 거듭된 완착으로 검토실에서는 『판이 기울었다』는 소리와 함께 『고바야시가 지고싶어도 질 곳이 없는 바둑』이라는 극언(?)까지 나왔다. 따라서 결승5번기의 종점도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조9단이 불사조같은 투혼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 남들이 다 졌다고 생각한 바둑을 조9단은 무서운 집념의 승부사 기질로 역전시켰던 것.
어쨌든 이번 제8기대회 결승전은 묘하게도 세판 모두 조9단의 일대 역전극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황원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