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데스크 칼럼] 람보와 해바라기…국군포로

‘전사 통지서를 받고도 한가닥 희망 속에 소련 구석구석을 헤맸던 여인은 남편을 찾아냈지만 결국 눈물을 삼키며 돌아섰다.’ 여배우 소피아 로렌이 열연한 영화 ‘해바라기’의 한대목이다. 2차대전의 전장으로 떠났던 신혼의 남편은 이미 현지 여인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아 살고 있었다. 신분도 이탈리아군 포로가 아니라 포로 출신의 소련 노동자로 변했다. 또 다른 영화의 한 토막. 각개전투의 천재가 베트남군의 복판으로 들어가 잊혀졌던 미군 포로들을 구해낸다. 영화 람보의 줄거리다. 람보와 해바라기는 포로를 소재로 삼는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포로=구출대상' 구조적 오류 눈을 국군 포로로 돌려보자. 정부가 비전향 장기수 정순택씨의 시신을 북송한 후 비전향 장기수와 국군포로의 송환을 연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당연한 소리처럼 들린다. 미국은 수십년된 전사자의 유해까지 발굴, 안치하려고 애쓰지 않는가. 그러나 국군 포로 문제를 ‘포로=국가가 책임지고 구해내야 할 자국민’이라는 당위성으로 일반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국군 포로는 ‘해바라기’와 ‘람보’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북한 인민군의 포로로 잡힌 후 현지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고 공민증을 받아 직업을 갖고 생활했다는 점에서 해바라기의 경우와 비슷하다. 북한 체제로의 동화를 거부하고 포로의 신분을 유지했다면 특공대를 투입해서라도 구출해내야겠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일부는 인민군으로 복무한 경력도 있다고 한다. 시간의 단면을 두부처럼 잘라 포로로 잡힌 국군이 현지 여인과 결혼하거나 인민군으로 복무하는 시점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구출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군 형법의 처벌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국군 포로들이 생존의 위협 속에서 선택을 강요받았을 수 있다는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가정을 꾸며 북한 체제에서 생활했던 점은 사실이다. 때문에 북한을 탈출해 넘어오는 국군 포로의 명칭도 단순히 ‘국군 포로’가 아니라 ‘국군 포로 출신의 북한 주민중 탈북자’가 보다 정확하다. 그럼에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해지고 있다. 중국 연변 등지에 널린 밀입국 브로커 사이에서는 ‘국군 포로 출신 탈북자는 황금’이라는 말도 돈다고 전해진다. 국가에서 밀린 월급을 계산해 보상금을 지급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국군 포로 출신 탈북자가 정착금 수령을 거부한 적도 있다. 특별대우를 원했던 밑바탕에는 국군 포로를 마치 영화 람보에 나오는 포로처럼 생각하는 사회적 착시 현상이 깔려 있다. 실상파악·인도적 접근 병행해야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순착시 현상이냐 아니면 거대한 착각구조냐는 점이다. 후자에 가깝다. 단순착시라면 쉽게 수정이 가능하지만 ‘포로=구출 대상’이라는 일반화의 오류가 구조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보다 중요한 점은 착각구조가 언제부터 어떻게 형성됐는가를 따져보는 데 있다. 이승만ㆍ장면ㆍ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하에서는 국군 포로 문제가 왜 거론조차 되지 않았는지부터, 본격적으로 문제가 불거진 지난 94년 이후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 사회 전체가 얼마나 노력했냐는 점을 따지는 게 순서다.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국군 포로 문제를 통해 미국처럼 ‘언제 어느 곳에서 포로가 돼도 국가가 반드시 구해낸다’는 전통을 만들어나가자는 견해도 있다. 그런 전통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냉엄한 비판과 진실에 기반하지 않는 전통은 쉽게 무너지게 마련이다. 국군 포로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고 진실이 규명돼야 할 문제다. 질곡의 삶을 살아온 국군 포로들을 위해서도,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도 그렇다. 정부의 인도적 차원의 접근을 통한 해결 노력을 지켜보면서 우리 내부의 오류는 없었는지 살펴봐야 할 때다. 잘못된 인식은 왜곡을 낳는다. 왜곡이 쌓이면 역사는 뒤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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