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1월26일] 간송 전형필

[오늘의 경제소사/1월26일] 간송 전형필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더러는 바보라고 여겼다. 고서화며 도자기를 사들이는 데 10만석 재산을 쏟아 부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간송(澗松) 전형필. 사재를 털어 문화재 해외유출을 막아낸 그는 국가와 후손에게 막대한 경제적ㆍ문화적 가치를 남겼다. 휘문고보와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마친 그에게 돌아온 것은 10만석이 넘는 유산. 증조부 때부터 종로 일대의 상권을 거머쥔 전씨 가문은 조선 최고의 부자였다. 전형필의 부친이 벼슬(통정대부)까지 지내 양반가로도 행세했다. 젊고 돈 많은 청년이 택한 것은 문화재 수집. 식민지의 젊은이는 일본인 손에 넘어가는 문화재를 건져냈다. 명품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시세의 2~3배를 얹어주니 시중에 나온 명품은 자연스레 그에게 흘러왔다. 일본으로 건너가 영국인 개츠비에게 10만원을 주고 국보급 청자 10점을 사들인 적도 있다. 서울시내 번듯한 집 한 채에 1,000원 하던 시절이다. 간송은 한번 사들인 문화재를 내다팔지 않았다. 2만원에 구입한 고려청자(천학매병ㆍ국보 68호)를 4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한 일본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물건을 갖고 온다면 팔겠다. 가격은 매입가 그대로"라고 말한 일화는 조선 사람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소장품은 날로 쌓여갔다. 1938년 간송은 서울 성북동에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保華閣)을 세웠다.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이다. 그곳에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견줄 만한 국보와 보물이 가득하다. 간송은 나라가 할 일을 대신 해냈다. 1962년 세상을 떠난 그가 남긴 문화재의 경제적 가치는 수천억원을 넘는다. 모든 게 민족의 자산이다. 우리도 이런 조상이 있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입력시간 : 2005-01-2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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