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홍현종의 경제프리즘] 늙은 유럽의 '다섯 수'

“1980년대 느리게 움직이던 유럽은 세계 경제의 장기판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1990년대를 시작했다. 종반부 게임에서 백이 어떻게 둬도 흑은 다섯 수만 더 두면 이길 수 있는 상황이다. 다섯 수를 찾는 일이 쉽진 않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런던 자본시장과 독일의 생산과학기술, 구소련의 첨단과학, 게다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디자인 감각을 합해 효율적 투자가 이뤄진다면 지구촌 경제의 주도권은 그들의 몫이다.” ‘제로-섬 사회’의 저자 레스터 써로우 미 MIT 교수의 10년전 예측은 적어도 현재까지 거의 틀려가고 있다. 그 다섯 수를 찾지 못해서일까? 써로우 교수가 정확히 규정해 놓진 않았지만 이를 테면 유럽 통합 문제는 그 다섯 수중 하나일 듯 싶다. “유럽에서 전쟁은 평상적인 상태다”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피터 크로포트킨의 유명한 말처럼 전쟁 없는 시대가 거의 없었던 ‘오래된’ 대륙 나라간 국경을 허문다는 게 얼마나 만만치 않은 작업인가를 통합의 진통을 겪고 있는 유럽의 최근 상황은 말해주고 있다. ‘오래된’, 좀더 거친 표현으론 ‘늙은(old) 유럽’이란 말을 온 세상에 유행시킨 사람은 미국의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다. 이라크 전을 앞두고 자기네 미국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특히 독일과 프랑스를 향해 쏴 붙였던 표현이다. 자신이 칠순 노인인 럼스펠드의 ‘늙은 유럽론’의 경제사회학적 근거는 우선 심각한 고령화 사회다. 2050년 은퇴인구가 전체의 절반을 차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올 정도다. 유럽의 늙음은 그런데 정작 물리적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기업가 정신, 경제 성장을 위한 동력(動力)에서 노쇠한 기운이 역력하다. “빌 게이츠 신화가 왜 유럽엔 없나” 얼마 전 EU 집행위원회는 유럽의 실종된 벤처 정신을 한탄하며 기업가 정신 무장운동을 제기했다. 보고서를 통해 위원회는 미국인들이 실패를 두려워 않고 기업 창업에 나서는 반면 유럽인들은 월급 생활에 만족하고 리스크 있는 창업을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가 특히 제조업 부문에서 내노라 할 세계적 기업이 손에 꼽을 정도란 사실이다. 교육제도에 대한 비판도 이어진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끝없이 경쟁하는 미국의 젊은 교육제도에 비해 평등주의 덫에 걸린 영국 옥스포드대 캠퍼스의 불빛은 희미해져 가고 있다고 비유했다. 그렇다고 유럽 전체가 모조리 노쇠한 건 아니다.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등이 고 실업과 재정적자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는 반면 젊은 에너지로 국가 경쟁력을 키워가는 역내 국가들도 있다. 북부 유럽의 경우다.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등은 빠른 변신을 통해 역동적인 경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 특히 사회민주당이 장기 집권 했음에도 기업 활동을 독려하는 등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유럽의 희망의 불씨가 구대륙이 아니라 젊은 북부 유럽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세계를 지치게 하는 미국의 일방주의와 독주를 막아 낼 수 있는 곳은 이라크 전을 앞장서 반대한 프랑스 독일의 경우처럼 현재로선 그나마 EU 뿐이다. 중국이 미국과 맞서보려 하지만 아직은 상대가 아니다. 또 중국의 힘이 그 정도로 커진다 해도 그들의 성숙한 지구촌 리더십은 어쩐지 기대하기가 여의치 않다. 강대국의 움직임에 신경을 쓸 수 밖에 나라들로선 한 나라의 일방적 독주보다 세력의 평형상태가 어쩌면 정치경제 전략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 EU가 써로우 교수가 말한 다섯 수를 제대로 읽고 젊은 대륙으로 거듭나 미국을 견제하는 세력 지도를 그려나가는 게 지구촌을 위해서 괜찮은 모양새 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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